1편
※ 본 소설은 4.19혁명 시기를 배경으로 한 작가의 창작 글입니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학교, 건물, 인물, 주요 사건은 모두 상상으로 만들어진 허구임을 밝힙니다.
● 하프타임-1
계절이 바뀌려는 길목에 걸쳐 있다. 아니, 바뀌리라는 희망으로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떡갈나무 가지에 붙은 봉오리도 힘차게 태동하려 애쓰는 것 같았다.
“박 감독. 이번 대회 열심히 준비해서 우리 굴봉고등학교의 위상 좀 높여 보세.”
“네, 이사장님.”
목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버스 운전사는 환히 웃으며 나를 맞았다.
“제임스 체육관까지는 고속도로가 새로 뚫려서 더 빨리 갈 수도 있어요.”
“네…. 안전하게 잘 부탁드립니다.”
제임스 체육관. 기억의 등불을 끄려고 노력해 보아도 더욱 선명해지는 곳. 꺼지지 않는 불야성과 같은 곳. 과거의 기억이 모기향처럼 피어올랐다 흐려졌다.
● 전반전
#1
봉황중학교는 언덕배기 한가운데 자리 잡은 학교다. 6‧25 전쟁 때 부산으로 피란민들이 몰려들어 지은 무허가 슬레이트집이 알을 품은 봉황처럼 겹겹이 학교를 둘러쌌다. 달걀부침의 노른자위가 우리 학교, 그것을 둘러싼 흰자위는 슬레이트집. 이 조합을 합쳐 봉황마을이라 불렀다.
1960년 3월 15일, 부통령 선거에서 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해 자유당과 정부 차원에서 저질렀던 부정선거의 내막이 언론을 통해 서서히 드러났다. 이 사건은 국민의 마음을 얼음장처럼 무겁게 만들었다. 새 정치를 향한 여망은 봉황마을에도 알게 모르게 숨죽이며 배어들었다.
“모두 집합! 새로운 감독님이다.”
축구부 코치가 축구부원들을 불러 모았다. 교장 선생님과 함께 새로운 감독이 걸어왔다. 남색 정장 차림에 색 바랜 갈색 구두를 신고, 그는 잔디 한가운데를 쓸며 조용히 다가왔다. 구릿빛 피부와 이성적인 눈매 속엔 해독할 수 없는 코드들이 아득히 담겨 있었다. 감독의 손목에는 낡은 가죽띠 시계가 헐겁게 매여있었지만, 팔뚝의 굵은 핏줄이 시곗줄과 팔뚝 사이의 빈틈을 가득 메워 터질 것 같았다.
“여러분. 새로 오신 감독님께서는 서울의 축구 명문 진봉고등학교 코치로 계셨습니다. 힘들게 모셔왔겠죠? 감독님 자기소개 좀 해주시죠.”
교장 선생님은 목울대를 힘껏 떨며 자랑스럽게 말씀하셨다.
“반갑다. 이번에 감독을 맡게 된 김상혁이다. 목표는 전국대회 우승. 다음 주부터 본격적으로 훈련을 시작할 거다. 무엇보다도 훈련 시간을 철저히 지킬 것.”
피부색과 어울리는 말투는 남다른 힘을 머금고 있었다. 고목처럼 꼿꼿이 선 채, 부원들의 기운을 짓찧는 듯 흘겨보는 눈매는 우리들의 마음 한구석을 불편하게 했다. 우리들의 불편한 기색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갑자기 어디론가 걸어갔다. 모두 어리둥절하여 서로를 멀뚱멀뚱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나 이내 축구부원들은 날개 돋아난 곰처럼 사방팔방 자유롭게 운동장을 뛰어놀았다.
“이놈들아! 숙제는 하고 노냐!”
과학 선생님이었다. 아차 싶었다. 내일까지 제출할 과학 숙제가 떠올랐다. 교사 대부분은 운동부 소속 학생들이 숙제를 제출하지 않더라도 암묵적으로 면벌부를 발급해 주었다. 그러나 과학 선생님은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일부 학생을 숙제의 대열에서 이탈시키는 것은 교사로서 직무유기라고 여겼다.
#2
“이번에 우리 학교가 마음을 단디 먹었나 보다. 솔직히 놀랐다 아이가. 전국대회가 애 이름이가?”
“니 헛발질 땜에 전국대회 진출이 우주로 증발한 거 아이가.”
담소를 나누며 깔깔거리고 있을 때, 김상혁 감독이 저만치 멀리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옹골진 걸음새가 반복될 때마다 운동장 흙은 화석의 흔적처럼 깊게 팬 자국을 남겼다.
“안녕하세요!”
언제나 자유분방한 우리 팀 분위기에 젖어, 인사는 돌림노래가 되어 웃음과 함께 뒤죽박죽 섞여버렸다. 그는 묵묵히 눈을 감은 채로 말이 없었다. 불편한 정적이 분위기를 석고처럼 굳게 만들었다.
“다시 인사해.”
그의 목소리는 쇳덩이처럼 묵직하게 다가와 긴장감을 조성했다. 얼결에 민우가 구령을 붙였다.
“차렷!”
민우는 뜸을 들이며 아이들이 일제히 차렷 자세를 취하길 기다렸다.
“경례! 안녕하십니까.”
그제야 감독은 고개를 끄덕였고, 우리들의 이름은 출석 확인이라는 형식으로조차 불리지 않았다.
“기량 테스트를 하겠다. 미리 팀을 짜두었으니 주장은 나와서 이 명단대로 팀을 나눠 시합을 진행해라.”
우리와 일면식도 없던 감독이 미리 팀을 가른 기준은 베일에 싸여 있었다. 경기가 예열의 단계를 벗어나 서서히 무르익을 무렵, 나는 특유의 개인기로 수비 셋을 따돌렸다. 곧이어 상대 팀 수비 둘과 맞닥뜨렸다. 그러자 바로 뒷공간에서 팀 동료가 든든하게 받쳐주고 있다는 신호를 보냈다. 선택의 폭은 넓혀졌다. 백(back) 패스를 하고 유리한 곳을 찾아 들어가 리턴패스를 받는 게 더욱 쉬운 길처럼 보였다. 하지만 비합리적이라 느껴지더라도 골을 넣을 것만 같은 확신이 들었을 때, 자신만의 플레이를 과감히 펼쳐야 한다는 게 나의 지론이었다. 합리적 조직력 속에서 이탈하는 한 개성이 경기의 새로운 변수를 만들어낸다. 이는 축구라는 조직적인 스포츠를 더욱 빛나게 하는 미(美)의 본질이라 생각했다. 결국 중거리 슛을 때리는 쪽을 선택했다. 공의 정중앙이 발등에 닿았다. 공의 가죽이 만들어낸 충격음은 깔끔했다. 공은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며 골대를 철렁였다. 이어지는 골 세레머니 속에서 감독은 그물이 일으킨 파동을 무표정으로 응시했다.
“삐익!”
킥오프를 알리는 호루라기 소리가 운동장 정중앙을 가로질렀다. 그 소리는 새로운 국면을 암시하는 듯했다. 상대 팀의 경기 운영 방식은 변했다. 돌진해 오다가 패스를 후방으로 돌리면서 공격의 완급을 조절했다. 공은 자석과도 같았다. 자기력의 방향으로 나침반의 바늘이 일정한 방향으로 따라가듯, 우리 팀 선수들은 상대 팀의 마리오네트 인형이 된 마냥, 공을 정신없이 쫓아다녔다. 서서히 마리오네트는 자신도 모르게 지쳐갔다.
돌연 민우가 중앙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성진이의 스루패스를 받기 위해 앞으로 전력 질주했다. 힘차게 튕겨 나가는 탄환처럼 탄력적이고 허를 찌르는 움직임이었다. 그는 우리 팀 수비수 사이로 난 빈틈을 절묘하게 헤집고 들어와 자신의 발 앞에 공을 안착시켰다. 군더더기 없는 최소한의 동작으로 그는 공을 내리깔아 찼다. 골대의 우측 구석은 마개 열린 배수구처럼 깔려 오는 공을 빨아들였다.
“삐-익!”
심판의 호루라기 소리가 울렸다. 느닷없이 경기를 중단하고 모이라는 신호였다. 모두 허둥지둥 감독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모든 게 엉망이군.”
“감독님. 어떤 부분이 문제였는지 말씀해주십시오.”
나와 한 팀을 이루어 경기를 펼쳤던 혜규가 물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바로 네가 뛰었던 팀이!”
감독은 독한 나뭇가지를 우려낸 물을 뱉는 마냥, 우리의 경기력을 향해 반성을 권하는 철퇴를 휘둘렀다. 그의 말은 둔탁한 종소리처럼 울렸고, 의문으로 가득 찬 마음의 허점을 깊숙이 찔러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