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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kim Oct 08. 2019

처음의 설렘도 좋고,
예전보다 성장한 내 모습도 좋네.

19년 07월 17일




나는 콜롬비아에 학교 선생님으로 왔다. 사실 이때까지 모르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다 싶어서 말해 본다. 놀고먹고 자고 또 놀고 유튜브 보고 그러다 가끔 글 쓰려고 머리를 쥐어뜯고.. 그러려고 온 게 아니다. 놀랍게도 수업을 하러 온 것이다. 그리고 역사적인 첫 수업을 시작하기로 한 날이 성큼 다가왔다. 처음은 언제나 떨리고 두렵다. 언젠가 떨면서 처음 두 다리로 걸은 날이 있었다. 이런 글을 처음 끄적이는 때도 있었고 첫 연애도 있었고 첫 헤어짐도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살다 살다 첫 스페인어 기계 수업을 앞두고 있다. 세상에 별일이 다 있다 정말. 내가 맡게 된 수업은 CNC수업이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기계를 자동으로 돌리는 기술인데 문제는 이 기계가 학교에 없다는 거다. 영상이나 여러 자료로 설명을 아무리 한들 백문이 불여일견. 만지기는커녕 보지도 못한 기계를 상상하게 하며 가르쳐야 한다. 상상의 어원은 고대 중국인들이 코끼리 뼈를 보고 코끼리가 어떻게 생겼을지 생각해 보는데서 시작했다고 한다. 나도 그저 숫자 알파벳 나열들로 어떻게 기계가 작동하게 될지 상상하게 만들어야 한다. 이건 한국 말로도 가르치기 힘들다. 게다가 이 콜롬비아 질풍노도의 아이들은 말도 안 듣고 말도 안 통한다. 도망가고 싶다. 한국이 절로 그립다. 그래도 언제나 처음만 지나면 별게 아니니까. 지금은 걷는 거나 글 쓰는 게 두렵지 않으니까. 게다가 집 계약을 22개월을 한터라 해약금만 천만 원이 넘는다는 사실도 내게 용기를 준다. 아니면 절벽으로 서서히 밀어준다고도 할 수 있으려나.


7월 20일은 콜롬비아 독립기념일. 아이러니하게도 스페인 사람인 시몬 볼리바르에 의해 독립되었다.




나의 역사적 첫 스페인어 기계 수업은 월요일 오전 9시 반에 시작했다. 생각보다 긴장되지 않았다. 나보다 못난 놈들 앞에서는 이상하게 별로 안 두렵다. 약한 사람한테는 강하고 강한 사람한테 약한 전형적인 비겁한 남자라 그런가 보다. 나름 5달 동안 배운 스페인어는 정확하진 않지만 대충 뭔지 설명할 정도로는 되어서 수업 진행도 어렵지 않았다. 옆에 함께 있어준 선생님들이 시기적절하게 중간에 끊고 설명해준 덕도 있었다. 첫 수업이 성공적으로 끝나고 학생들한테 하나하나 하이파이브하며 고맙다고 했다. 이 친구들은 알까? 나의 역사적 첫 수업의 첫 학생들이라는 걸. 수업 마치고 학교를 나서는 길. 나의 수업을 들은 학생들이 "산티아고!" 하면서 멀리서 손이 빠져라 흔든다. 콜롬비아가 조금 더 좋아졌다. 다음 수업 때는 숙제를 조금 줄여줄까 싶기도 하다. 이렇게 한발 한발 걸어가고 있다.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다. 그래서 조금씩 성장하고 있다. 어제보다 조금 더 나은 내가 된다. 그래서 내일이, 모레가, 내년이 기대된다. 그래서 그런가 밤에 자는 것보다 아침에 눈뜨는 게 더 좋아졌다.


나의 첫 제자 들와 첫 교실. 질풍노도의 시기의 아이들이라면 이 정도 철창은 필요하다고 본다.




다른 분야에서도 나는 요즘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 바로 글쓰기이다. 가끔 서 넉 달 전에 쓴 글들을 읽어보는데 절로 고개 절레절레 저어진다. 이렇게 못 쓴걸 무슨 배짱으로 올렸는지 모르겠다. 지금도 잘 쓰는 건 아니다. 어쩌면 누군가는 오히려 나의 글쓰기가 퇴보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분명 글을 조금씩 더 잘 써가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고 느낀다. 팔불출 같지만 요즘 내가 쓰는 글들 다시 읽어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제발 다른 사람도 이렇게 재밌게 읽어주면 좋겠다. 그리고 꼭 사카린처럼 달면서도 불량식품 같은 맛이었으면 좋겠다. 글의 실력에 늘어가고 있지만 그에 따라서 글 쓰기도 점점 어려워진다. 산업공학에서는 학습곡선이라는 개념이 있다. 일을 하는 시간에 비례해서 일의 능률이 점점 올라간다는 개념이다. 근데 나의 글쓰기만큼은 이 학습곡선과는 관계가 없나 보다. 처음에는 30분이면 뚝딱 글 하나 정도는 써냈었는데 요즘은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잡고 있어도 써지지 않는다. 겨우겨우 천자 조금 넘게 적었다가도 다 지우기 일수다. 머리도 막 쥐어뜯으면서 적는다. 탈모의 원인이 글쓰기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딴 글에 이렇게 마음고생한다는 것도 부끄럽기도 하다. 아마도 더 잘 써야지라는 부담이 크기도 하고 내가 가진 밑천도 다 드러났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어떻게든 쓰다 보면 뭐든 얻어걸리는 게 있을 거니까. 어차피 내 인생이 그렇게 얻어걸리던 게 아니었던가.




가끔 아주 가끔 아니 사실은 딱 한번 누군가 나에게 글을 어떻게 쓰냐고, 어떻게 그렇게 잘 쓸 수 있느냐고 물었다. 업계 비밀이지만 글 쓸만한 소재가 없으니 풀어볼까나 한다. 다들 믿지 못하겠지만 나는 평소에 드는 생각들을 메모해 놓는다. 경제문제부터 책에서 읽은 재미있는 생각, 나의 철학적 고민과 단순한 불평불만, 뭘 먹고 싶은지까지 정말 중구난방 별 시답잖은 아이디어도 다 적어 놓는다. 그렇게 적어놓고 저장해 두었다가 글 쓸 때 에스프레소 한 대접을 끓여놓고 앉아서 메모를 읽으며 쓸 글을 구상한다. 예전에 악동뮤지션의 찬혁에게 누가 질문했다. 음악적 영감은 어떻게 얻냐는 질문이었다. 찬혁은 잠깐 고민하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제 머릿속에 이쁜 할머니를 모셔두면 그때 영감이 오더라고요." 미친 얘기 같지만 전부 사실이다. 나도 그 메모를 보고 이쁜 할머니를 머릿속에 모셔둔다. 그러면 영감이 찾아온다.




이렇게 브런치에 적는다. 글씨체는 보지 마세요.


사실은 영감이 올 때까지 끊임없이 머리를 괴롭힌다. 게임하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유튜브 보고 싶은 마음도 누른다. 대신 폭력적일 만큼 강한 쓴 맛의 에스프레소로 뇌랑 혀를 계속 괴롭힌다. 빨리 쓸만한 글의 영감을 내어 놓거라 아니면 뇌 뉴런 하나하나를 에스프레소로 절여버리겠다. 그렇게 커피 고문을 하다 보면 뇌는 금방 굴복해서 뭔가 쓸만한 게 나온다. 그리고는 그 영감에 따라서 글의 단락의 주제를 정하고 줄줄줄 써 내려간다. 여기서의 포인트는 별생각 없이 끝맺을 때까지 뒤돌아 보지 않고 폭주 기관차처럼 써 내려가는 것이다. 글 하나 쓸 때 3천 자 내외로 쓰는데 평균 30분이면 다 쓴다. 그리고 글을 다 썼다는 해방감에 세상 흥청망청 논다. 잠도 잔다. 그냥 묵혀놓고 건들지도 않는다. 그러다 글의 주제가 뭐였는지도 기억 안 날정도로 글이 뇌에서 모두 씻겨 내려갔을 때 그 끔찍한 글을 다시 마주한다. 그러면 개판인 글에 어디에 뭐가 부족한지 쏙쏙 보인다. 그때의 영감과는 다른 편집자 같은 비판적인 자아가 죄다 고쳐준다. 심리학에서는 "부화"라는 개념이 있다. 문제를 겪는 당시에는 답을 떠올리지 못하지만 몸과 마음이 잠시 떠나 있으면 불현듯 새로운 생각들이 떠올라 답을 찾는다고 한다. 그래서 여행이 무슨 '무안단물'이라도 된 듯 칭송받는 이유는 현실의 문제에서 잠시 몸과 마음이 떠나 새로운 해답을 찾기 때문이라고 한다. '무안단물'과 같은 긴 휴식을 취한 다음 한번 다시 쑥 검토하고 이리저리 헤집어 놓으면 그제야 쫌 누구 보여줄 만한 글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대충 찍은 사진 몇 장 첨부해서 올리는 거다.




매주 이렇게 글 쓰는 시간이 마냥 재밌지 않다. 사실은 고문이고 고통이다. 더-럽게 재미없다. 그래도 쓰고 나면 오는 그 보람. 그리고 달아주는 댓글과 좋아요. 그리고 쌓여가는 나의 글들을 보면 그렇게 뿌듯할 수 없다. 이런 거 보면 나는 참 관종이다. 하하하. 봉사도 봉사지만 글을 더 잘 쓰고 싶다. 잘 쓴다는 뜻은 "더 잘 표현하고 싶다"는 뜻이다. 나의 마음과 생각과 부질없는 개그욕심까지 전부 잘 표현하고 싶다. 그래서 읽고 나서 나를 이해해줬으면 공감해 줬으면 그리고 깔깔깔 웃어줬으면 좋겠다. 더 "잘 쓰는" 그 날까지. 그리고 콜롬비아 생활을 끝내고 인천 공항에 도착해서 떡볶이를 먹는 그 날까지 이 한없이 가벼운 나부랭이 글들을 계속 써 내려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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