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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kim Oct 20. 2019

메데진 :
너의 비참한 삶은 나의 인스타용 사진으로

19년 08월 08일




비행기 창가에 혼자 앉았다. 메데진에서의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 과장 조금 보태서 버스만 한 크기의 비행기에는 승객은 스무 명도 없다. 나의 자리는 비행기 날개에 가장 가깝고 가장 시끄러운 자리. 날개 저쪽 제트엔진이 달려있었어야 하는 자리에 대신 큰 프로펠러가 달려있다. 날개와 너무 가까운 자리인지라 날개에 달린 나사 홈도 보이고 녹이 슬어있는 것도 보인다. 자세히 보면 볼수록 이 날개는 너덜너덜이란 말이 제일 잘 어울린다. 공교롭게도 내 옆에 팔걸이도 너덜너덜이란 말이 잘 어울리게 망가져있었다. 그러다 불현듯 "이게 날기는 할 수 있을까"라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공대 공부 4년. 게다가 유체역학을 두 번에 걸쳐서 배웠다. 하지만 여전히 나의 비루한 머리로는 양력을 이해할 수 없다. 아니 믿을 수가 없다. 어떻게 압력의 차이로 이 수십 톤의 쇠 덩어리가 하늘을 날 수 있는 걸까. 차라리 호그와트에서 고용된 마법사가 몰래 관제탑에 숨어서 조종한다고 하면 납득할 것이다. 특히나 이런 조잡한 비행기가 단순히 저 커다란 프로펠러 두대가 빙글빙글 돈다고 해서 날 수 있다니... 납득할 수 없다.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치는 중 그 프로펠러는 내 생각이 마음에 상했다는 듯이 삐걱이는 큰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내가 지금 죽는다면 코이카 관계자들이 참 곤란해하겠구나. 이만하면 썩 괜찮은 삶이었다는 생각이 들지만 더 잘 살걸 그랬다. 이렇게 죽을 줄 알았으면 그때 7000원짜리 히말라야 분홍 소금을 살걸 그랬다. 좀 더 더 안일하고 적나라하게 살걸 그랬다." 이상하게도 비행기, 그것도 창가 자리만 앉으면 참회의 시간을 가지게 된다. 커다란 건물이 레고보다 작아지는 이 시간, 양력이라는 건 사기였다는 듯 바닥에 처박혀버릴 비행기를 상상하는 몹쓸 상상은 나의 삶을 뒤돌아보게 만든다. 사실 비행기 사고가 날 확률보다 집에서 공항까지 가는 택시에서 사고 날 확률이 더 높다고 하지 않는가? 어차피 아무 일 없이 도착할게 뻔하지만 눈으로 보이는 그 풍경에 덜컥 겁부터 먹게 된다. 아마 타고난 우리 집안 겁쟁이 DNA의 작품일 것이다. 아무 일 없이 발을 땅에 붙이게 되면 잠시 고요히 감사하다. 이렇게 한 번 더 거듭난다. 금방 또 곧 잊혀버릴 감사지만.


저런 조잡한 쇠덩이가 하늘을 날 수 있다니 여전히 믿지 못하겠다.




메데진을 놀러 가는 그 날은 그다지 특별하지 않았다. 대신 새벽 5시 비행기여서 공항에 일하는 사람보다 먼저 공항에 도착했다는 점만 뺀다면 말이다. 해가 떠오르려는 시간에 떨어진 메데진은 아름답다기에는 기이한 도시였다. 착륙하는 비행기 안에서 바라본 도시는 붉은색 벽돌로 지은 집들이 거북이 등에 붙은 따개비처럼 따닥따닥 산등성이에 붙어있었다. 콜롬비아의 대표적인 공업도시인 메데진은 미세먼지의 텁텁한 맛으로 나를 반겼다. 작은 공항에는 그렇다 할 큰 식당이 없어서 첫 여행 음식으로 핫도그를 먹었다. 배고파서 허겁지겁 먹고 나니 핫도그 포장지에 구멍이 뚫려있었다. 내 치열과 같은 모양으로. 택시를 타고 근처 현대미술관을 구경하는 것으로 여행의 시작을 밝혔다. 꽃과 미녀의 도시라는 말이 그냥 있는 말이 아닌 듯 군데군데 눈이 밝아졌다.


콜롬비아 나의 최애 Bandeja Paisa반데하 빠이사. 반데하 빠이사 먹을 줄 아는 사람은 비벼먹는다. 콜롬비아식 비빔밥인 거다. 비벼 먹으면 좀 먹을 줄 안다고 인정받는다.


메데진을 여행한다고 하니 교장선생님은 물론이고 만나는 사람마다 나보고 조심해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조심해라. 혼자 다니지 마라. 귀중품 가져가지 마라." 나는 그게 부모님들이 하는 "방 좀 치워라, 핸드폰 좀 그만 봐라, 일찍 일찍 다녀라"같은 그냥 하는 잔소리인 줄 알았다. 하지만 메데진은 달랐다. 해가 넘어가기 시작하지만 메데진을 아직 제대로 못 봤다는 불안감으로 별생각 없이 택시를 잡아서 센트로로 향했다. 해는 뉘엿뉘엿 넘어가고 도로는 정체되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만난 동기 코이카 선생님들이 반가워서 이야기로 택시 안을 가득 채웠다. 하지만 센트로를 들어서는 순간, 주변에 달라진 공기에 우리의 분위기도 급속도로 식었다. 길가에는 쓰레기로 산이 쌓여있다. 위험이라는 글자를 이마에 써붙여 놓은 듯한 사람들이 도로에 가득했다. 그 잠깐 사이 싸움이 났는지 고성을 지르며 싸우는 걸인들이 있었고 길가에는 정신을 놓은듯한 여자들이 멍하게 허공을 보여 앉아 있었다. 담배처럼 보이지 않는 물체를 담배처럼 피우는 사람과 쓰레기 더미에서 쓸만한 걸 진열해서 판매하는 사람들. 드라마 영화에서만 보던 광경이 실제로 펼쳐졌다. 내렸다간 5분 안에 다 털릴 자신이 있었다. 목적지를 돌려서 안전한 대형마트로 발길을 옮겼다. 하지만 그때 본 풍경은 여행 내내 머릿속에 남겨져있었다.




그 풍경들은 코무나 13으로 이어졌다. 돈 벌러 온 가난한 이민자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코무나 13 지역은 한국의 달동네의 하드코어 버전으로 생각하면 된다. 도시 계획으로 만들어진 마을이 아니라서 집은 어지럽게 따닥따닥 붙어있었다. 차로 지나갈 수 있는 길 없이 그저 집 사이사이 미로처럼 구불구불한 좁은 길만 있었다. 그래서 이 곳은 경찰의 힘이 닿기 힘들었다. 그래서 무법지대였고 그렇게 콜롬비아에서 가장 거대했던 마약 카르텔의 시작이 만들어졌다. 2002년, 한국은 축구의 열기로 뜨거울 때 코무나 13 지역은 오리온 작전이라는 콜롬비아 정부와 마약 카르텔 간의 전쟁이 있었다. 마약조직원들을 잡기 위해서 일어난 이 전쟁은 오히려 코무나 13 지역의 주민들과 아이들에게 더 큰 피해를 입혔다. 수십여 명이 죽었고 수백여 명이 다쳤다. 그 이후로도 여전히 치안이 좋지 않았지만 서서히 바뀌어갔다. 마을의 이동수단으로 케이블카와 에스컬레이터가 생기고 마을 재생 프로젝트로 곳곳에 벽화가 그려졌다. 이제 유명 관광지라 많은 관광객들로 북적였다. 건물마다 근사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몇몇 장소에서는 힙합 공연을 하거나 댄스 공연을 하고 있었다. 관광지 어디든 볼 수 있는 과일 파는 수레와 그저께 빠를 파는 노점이 즐비하다. 화려한 그림들 사이 창문에 걸린 빨래 가지가 보인다. 쓰레기봉투로 만든 허술한 연을 날리는 아이들도 보인다.


코무나 13. 사람 사는 곳이 관광지라는 점이 먹먹했다. 이곳의 볼거리는 그들의 비참한 일상이었다.




이런 장소일수록 카메라를 들기 무섭다. 카메라는 이 풍경을 왜곡한다. 카메라는 이 처절한 삶의 현장을 인생 샷을 찍는 장소로 바꾼다. 아픔의 역사는 공기 중으로 다 흩어지고 그저 인스타에 올릴 그림들만 사진에 담긴다. 오늘 먹을 밥을 걱정하는 사람들의 넋 놓은 신음이 관광상품이 되어 버린다. 예전에 페루 쿠스코를 여행할 때 이쁜 원주민 옷을 입은 아이가 라마 열쇠고리를 1 솔에 팔고 있었다. 사진으로 본 아이는 아름다운 쿠스코 일상의 한때였다. 하지만 성당 뒤 구석에서 열쇠고리를 못 팔았다는 이유로 혼나는 아이는 그 사진에 없었다. 늦은 밤. 메데진에서 야경이 좋기로 소문난 Pueblito paisa로 향했다. 메데진은 야경을 아래에서 볼 수 있다. 산 능성 이를 따라 꼬무나 지역의 붉은 불빛이 줄지어 서있기 때문이다. 불타는 듯 어른거리는 붉은 불빛. 저 멀리 꼬무나 13 지역도 보인다. 멀리서 보면 아름답다. 사진으로 보면 아름답다. 하지만 가까이 가면 비극이다. 쉽게 결론을 내린 건지 몰라도 그 속의 삶은 깊은 비극 그 아래 켜켜이 쌓인 진흙과 같을 거다. 쉽게 나오기 힘든 복합적인 고통에 짓눌려 있을 테다. 늦은 밤 잠깐 즐기는 아름다움으로 이 광경을 보기에는 내 눈에 계속 코무나 13 지역에서 본 쭈글쭈글한 검은 쓰레기봉투 연이 어른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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