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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kim Nov 06. 2019

하기 싫은 일은
정말로 하기 싫다구요.

19년 08월 29일



가끔은 그런 날이 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를 만난 거다. 그런데 못 본 사이 일어난 일들이 너무나도 많은 거다. 누구랑 만나고 헤어졌다던가. 인생의 중대사를 결정했다던가. 고생 제대로 했다던가. 끝내주는 여행을 다녀왔다던가. 인생 맛집을 찾았다던가. 할 말이 참 많다. 하지만 있었던 수많은 일들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모르겠다. 그래도 그 와중에 또 반가움이 앞선다. 지금 키보드 앞에서의 나의 마음이 그렇다. 1주 안 쓰고 겨우 2주 되었는데 참 많은 일이 일어났다. 날 잡고 옆에 잡아둬서 이런저런 이야기하고 싶은 그런 날이다. 그래도 하나하나 풀기 전에 말하고 싶었던 말은 "참 보고 싶었다"는 거다. 내 인스타에 내 글을 봐주는 사람들. 특히 "설마 나까지도?"라고 생각하는 그 당신까지도 참 반갑다. 그럼, 제가 무슨 일이 있었나면요....




가끔 수도, 혹은 다른 지역으로든 콜롬비아 전 단원들이 모이는 행사가 여럿 있다. 먼저, 전에 한번 진행되었던 안전교육이 있다. 안전교육은 지진, 절도와 같은 위험상황에 대해서 재교육을 받고 회의하는 시간이라고 쓰지만 실상은 오랜만에 반가운 얼굴을 보고 한식을 먹는 시간이다. 그래도 교육은 아예 헛되지는 않은 듯 머릿속 구석구석 남아있다가 가끔 아주 가끔 위험할 것 같은 상황에 마주치면 떠오른다. 우리같이 나름 위험한 곳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꼭 필요한 시간이다. 그리고 현지평가회의라는 시간이 있다. 서로 단원 생활에 대해 회의하거나, 한식을 먹는다던가, 주로 일방적으로 우리의 불만을 사무실에 토로한다던가, 바뀐 규정에 대해서 잠깐 배우고 곧 까먹는 시간이다. 바로 저번 주 8월 넷젯주에 있었다. 그래서 바빴다.


회의장 앞 KOICA 스탠딩 배너. Felcidad para Todos. 모두를 위한 행복이라 해석할 수 있지만 이 회의시간만큼은 나는 저기 "모두"에 빠져있었다.




오랜만에 방문한 보고타는 참 차가웠다. 사람도 건물도 공기도 사람들 얼굴도 전부 찬 보고타와 대조적으로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 그새 새로 오신 선생님들, 코디 선생님들, 소장님, 그리고 반가운 한국음식까지 참 포근했다. 모여보니 40여 명. 꽤나 많다. 모두와 이야기를 나누진 못했지만 소장님은 소장님의 삶. 코디님은 코디님의 삶. 단원들도 각자 다른 삶. 콜롬비아로 온 40명쯤 되는 사람들은 각자 다른 40개의 삶으로 살고 있었다. 반갑고 즐겁게 시간을 보내었지만 다들 깊숙이 들어보면 어딘가 하나쯤의 어두움이 있었다. 이역만리 먼 타국에서 외국인 노동자로 살아가는 것이 쉽지만은 않을 테다. 게다가 다들 사실은 감정노동자와 다를 바 없다. 여기는 코이카의 최 밑단. 여기 현지인들과 가장 맞닿아 있는 우리들은 우리의 모습이 바로 국가의 모습이다. 그래서 싫어도 웃고 힘들어도 도와야 한다.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마음과 얼굴을 다르게 하는 건 중노동이다. 그래서 포커 플레이어들의 상금이 입이 떡 벌어지게 많은 것이다. 다들 한구석 힘듦을 토로하는 가운데 나의 코이카 단원 생활은 천국의 체험판을 보는 것 같다는 말을 하기가 힘들었다. 나의 매일의 감사함이 혹시나 다른 분들의 불행이 될까 겁났다. 그래서 힘든 척했고 그래서 미안하지만 현지평가회의는 내게 피곤한 일이었다. 그래도 지친 어느 날 하루 교장선생님이 전화해 주셨다. 코워커 도밍고 씨와 학교의 비선 실세라 할 수 있는 마리나 할머니의 목소리도 들린다. 보고타는 잘 갔는지 회의는 어떤지. 보고타는 추우니 감기 조심하라는 말로 걱정해 주신다. 꼭 가족이 전화 준 듯 고마웠다. 빨리 추운 보고타에서 따뜻한 부까라망가로 가고 싶었다.


보고타 오면 꼭 먹는 초밥. 추운 보고타 , 딱딱한 회의 사이 맛있는 초밥이 행복 아닐까




돌아온 부까라망가. 스위트 홈 오오 스위트 마이 하우스였으면 좋았으려 만. 돌아오자 산떠미 같은 일들의 연속. 게다가 보고타에서 달고 온 감기까지. 돌아가는 비행기에서부터 비행기 바닥이 꺼져라 한숨을 뱉어댔다. unab이라는 대학교의 Ulibro라는 북페어 행사 때문이었다. 매년 초대국을 초청해서 여러 가지 그 나라에 대한 활동을 하는 이 행사는 올해는 자문관님들이 힘을 좀 쓰셔서 한국이 초대국이 되었다. 물론 봉사하고 한국도 알리고 좋은 기회지만 그러기엔 할 일이 너무 많았다. 월요일 화요일은 잘하지도 못하는 스페인어 통역으로 하루 종일 끌려다닐 예정이었고 수요일 목요일에는 발표가 예정되어 있었다. 통역까지는 그래도 미리 준비한 자료 덕분에 어째 저째 끌고 갔다만 발표는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없었다. 평생 발표 포비아의 삶을 살아온 내가 유독 코이카에서 발표를 많이 하고 있다. 그래서 그렇게 스파르타식 교육으로 발표는 할만한 거구나 배워갔다. 하지만 이번만은 다르다. 사자를 절벽에 떨어뜨리는 것이 아니라 이건 뭐 우주복만 입혀놓고 우주로 던져버리는 식이다. 그래도 이런 평범한 한국인이 하는 발표 누가 보러 오겠어라는 조금의 낙관적인 마음도 있었건만 발표하는 홀을 보고 완전히 질려버렸다. 대충 세어도 300석은 나온다. 그 이후 매일 밤 지구가 두쪽 나버리길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다.




300명 앞에서 발표하고 일명 높으신 분들과 함께 먹은 염소 고기 정말 맛이 없었다. 나는 차라리 마음 편히 햄버거 먹을래.


그래도 무사히 다 지나갔다. 발표를 하는 그 순간까지 기도했건만 다행히도 혹은 불행히도 지구는 두쪽 나지 않았고, 300명 앞에서 발표라고 쓰고 스페인어를 줄줄 읽는 시간도 지나갔다. 통역 시간도 나름 무사히 지나갔고, 내 돈으로는 절때 못 사 먹을 음식도 대사님과 먹었다. 하지만 하기 싫은 일은 언제나 또 돌아올 거다. 중간고사 기말고사가 오듯. 대청소할 시간이 오고 이런 300명 넘는 사람 앞에서 발표해야 하는 시간이 언젠가 또 오듯. 엄마는 내게 그런 말을 하곤 했다. "언제까지 네가 하고 싶어 하는 일만 할 거냐"라고. "세상에는 하기 싫어도 해야 되는 일이 있다"라고. 엄마의 말은 옳았지만 나는 그래도 철없이 이렇게 살 거다. 하고 싶은 일들만 최대한 하면서. 이렇게 반가운 사람들에게 내 소식을 전하는 일이라던가 세상이 조금이나마 공정하고 살기 좋은 곳이 되도록 노력하는 일 그리고 새로운 것들을 알아가고 배워가는 일들만 주야장천 더 해나갈 거다. 그러다 이따금 오는 이런 하기 싫은 일들은 계속 어기적 어기적 하기 싫어하는 티 팍팍 내며 대충대충 끝내버릴 거다. 이러다 보면 그런 부탁 하는 사람도 줄어들겠지? 하고 싶은 일로만 내 시간을 채워도 시간이 부족한데 하기 싫은 일을 할 시간 따위는 없다. 그렇게 철없이 세상 물정 모르는 재수 없는 놈이 되어갈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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