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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kim Nov 12. 2019

나는 엘도라도에 살고 있습니다.

19년 09월 05일



¡싼티아고Santiago! 내 이름이 교정에 쩌렁쩌렁 울린다. 학교가 낯설다. 얼마만이지? 저저번 주는 보고타에 있었던 현지평가 회의로 못 갔고 저번 주는 Ulibro 행사로 300여 명 관중 앞에서 영혼까지 탈탈 털리느라 못 갔다. 2주 만에 몸도 영혼도 고루 다져졌다. 생각해보면 딱 14일 흘렀지만 힘들면 힘들수록 기간이 더 길게 느껴지는 건 과학이 아니던가. 내가 21살 시절 갔던 4주 군사훈련도 2년처럼 길게 느꼈듯 지난 2주는 2주가 아니라 한 학기가 흘려버린 느낌이었다. 그래서 아침 5시 50분 기상도 한 학기 전 일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2주 만의 출근인데 거하게 늦잠을 자, 30분이나 늦게 학교에 도착했다. 등교 길 내내 걱정스러웠다. 지각을 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혹시나 그 2주 사이 나와 학교 사람들 간의 마음의 거리가 멀어지지 않았을까 걱정되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모두 기우였다. 평소보다 30분 늦은 시간에 몰래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학교에 들어갔는데, 기계과 건물에 들어서자 말자 학생들부터 선생님들까지 ¡싼티아고Santiago! 하며 내게 인사한다. 심지어 맨날 날 보고도 못 본 척 지나가던 고양이마저도 나한테 야옹한다. 그리곤 다들 내게 와서는 묻는다. 2주간 도대체 어디 갔었냐고. 하도 안 보여서 한국 간 줄 알았다고. 이렇게나 환영해주니 뭉클했다. 학교 올 때 무거웠던 기분은 전부 나풀나풀 날라 가버렸다. 수업을 다 마치고 간 교장실에서도 다들 나를 환영해준다. 보고타는 어땠는지. 저번 주 있었던 콘퍼런스에서는 뭘 했는지 물어봐 주신다. 나는 연거푸 이야기했다. 지옥의 유황냄새를 맡고 온 것 같았다고, 학교가 너무 그리웠다고. 교장선생님이 껄껄 웃으며 내 어깨가 날아갈 듯 퍽퍽 친다. 좀 아팠지만 기분은 좋았다. 나는 여기서 환영받는 존재가 되었구나.


우리학교 기계과 사무실에는 이제 코이카 컵이 걸려있다.




행복을 느끼는 순간은 참 많다. 아마 오조오억 개도 넘을 거다. 오후 내내 창가에 걸어두어 햇볕 냄새가 콤콤하게 나는 이불을 덮을 때. 일요일 아침에 느닷없이 깨었다가 일요일이라는 사실에 안도하며 다시 잠들 때.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를 보러 가는 지하철에서의 설레는 덜컹거림. 닭갈비를 뒤적거리는 아르바이트생이 나지막이 "이제 먹어도 됩니다"라고 말해주는 순간. 여러 행복한 순간이 있지만 내게 가장 큰 행복의 순간은 내가 누군가에게 소중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느낄 때다. 그래서 내가 필요한 존재이며 꼭 도움이 필요하다는 듯한 느낌을 받으면 난 언제나 내 일처럼 도우려 한다. 반면 내 마음을 돈으로 살려는 듯 이야기하거나 젊은 사람이 이 정도는 해야지라는 뉘앙스로 말해버리면 팍 마음이 상한다. 특히나 "너 아니고도 할 사람 많지만 특별히 너한테 시키는 거야"는 완전 질색이다. 나한테는 돈보다 명예보다 명분보다도 사람의 마음을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 내 인생 첫 알바는 투썸플레이스 알바였다. 나는 그 매장의 첫 개점부터 함께 했었던 오픈 멤버였다. 첫 개점이라서 손님은 많았지만 알바와 매니저들 전부 처음 커피를 해보는 초보투성이들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그래서 일은 엄청 많았고 별것 아닌 것에도 시간을 오래 걸려서 제시간에 집에 간 적이 별로 없었다. 그래도 매일 마감을 마치고 편의점에 모여 앉아 야식을 먹으며 "고맙다. 덕분에 일을 잘 마쳤다"라고 해주는 말이 좋아서 그만둘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 손님은 줄고 할 일도 줄자 처음에는 잘 대해던 사장님이 이제 슬슬 변하기 시작했다. 나에 대한 인정이 없어지는 것을 느끼자 그날로 바로 사표를 내버렸다.




나의 이런 마음을 심리학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인정 욕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매슬로의 욕구단계론에 의하면 인간의 기본 욕구는 크게 5가지 생존 욕구, 안전 욕구, 소속 욕구, 인정 욕구 그리고 자아실현 욕구가 있다고 한다.(누구는 여기에 와이파이와 핸드폰 배터리를 넣어서 인간의 7대 욕구라고도 하더라. 충분히 일리 있는 말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욕구는 순차적인 단계가 있으며 하위 욕구가 충족되어야 상위 욕구가 생긴다고 한다. 그리고 하위에 위치한 네 가지 욕구는 충족된다고 크게 행복해지는 건 아니지만 결핍이 되면 불행해진다고 하며 맨 상위 욕구인 자아실현 욕구는 반대로 충족될수록 행복해진다고 한다. 그래서 자아를 실현하고, 아무리 기업에서 많은 돈을 주고 높은 지위를 준다고 하더라고 수면이나 쉬는 시간이 없거나, 안전하다는 느낌을 받지 못하거나,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거나, 인정을 받지 못하면 불행하다고 한다. 이 이론에 견주어 나의 삶을 봤을 때 너무 행복할 수밖에 없다. 일단 생존하는데 문제가 없다. 그리고 안전하다고 느낀다. 코이카와 학교에서 소속되어 여러 좋은 사람들과 일하고 있다. 내가 하고 있는 수업도 인정받고 있다. 게다가 이렇게 글을 쓰면서 자아실현도 하고 있으니 더할 나위 없이 좋다. 그리고 와이파이도 잘 터지며 핸드폰 충전에도 문제가 없다.


가끔 먹는 한국 음식도 엄청난 행복 중 하나




참 좋다. 행복하다. 내 삶에서 남은 바람이 있다면 이런 나의 행복을 나누는 삶을 살고 싶다. 좀 더 친절하게 살고 싶다. 먼저 웃으면서 인사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리고 긍정적으로 살고 싶다. 최근 들어 그런 분위기가 있다. 언제까지 가식적으로 웃으면서, 긍정적 인척 하고 살 거냐고. 착하게 살면, 이타적으로 살면 호구가 된다고 말하는 그런 분위기들. 어느 정도는 나도 이해한다. 감정에 솔직할 필요도 있으니까. 그리고 모든 사람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 안에서 자신의 가치관대로 살 권리가 있으니까. 그러니 나의 삶의 태도도 존중해준다면 고맙겠다. 하여튼 나로 인해 다른 사람들이 미소 짓는 다면 좋겠다. 나로 인해 다른 사람의 마음에 있는 상처가 회복되는 삶이 된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다. 사람의 뇌에는 거울 뉴런이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 사람의 공감능력에 큰 영향을 준다는 이 세포는 남들이 하는 행동을 보면 그 행동을 자신이 하는 것처럼 느끼게 해준다고 한다. 이 세포에 대해서는 아직 과학계에서는 의견이 분분하다곤 하지만 이런 세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어렴풋이 느낀다. 긍정적인 분위기도 우울한 분위기도 재채기도 하품도 전염된다. 누가 먹는 것만 봐도 먹고 싶어 지고 배고파진다. 누가 슬피 울고 있다면 그 슬픈 마음을 공감한다. 나의 호구스럽지만 이타적이고자 하는 마음도 긍정적인 생각도 이렇게 사람들 마음으로 고루 퍼지면 좋겠다. 좀 더 이기적이어야 성공하고 경쟁에서 이겨야 성공하는 각박한 세상에서 난 한숨 돌릴만한 껀덕지가 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해가 진다. 지는 노을이 너무 이뻐서 글 쓰다 멈추고 바로 옥상으로 향했다. 하늘이 금색으로 물들었다. 반대 저편에는 무지개의 꼬리만 살짝 남아있다. 이 넓은 도시에서 고개를 들어 이 풍경을 보는 사람은 몇이나 있을까. 옛날 스페인 정복자 시절 콜롬비아는 황금으로 만들어진 도시 엘 도라도 El Dorado가 있다는 전설이 있었다고 한다. 수많은 탐험가들이 그 황금도시를 찾으려 떠났지만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고 한다. 오늘 보니 그 엘도라도는 멀리 있지 않았다. 황금으로 물든 도시에 일곱 빛깔로 반짝이는 무지개까지. 나는 엘도라도에서 살고 있었다. 우리 모두는 황금빛 가운데서 살고 있었다.


하늘에도 황금빛, 땅에도 황금빛, 우리 마음도 황금빛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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