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옆에 있어주는 것 같지만 잠시 길이 같았을 뿐이다. 인생은 혼자다. 이 당연한 인생의 진리를 깨달은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 처음 부모님께로 독립했을 때였다. 슬라이드 애니콜 핸드폰을 개통하고 처음으로 고등학교 기숙사를 들어간 날, 나는 철저히 혼자라는 걸 깨달았다. 기숙사 근방 10km 이내에는 나를 아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리고 같은 방 쓰던 룸메이트들은 나만큼이나 소심했다. 서로 자기 전에 "불 끌까?" 하는 정도의 말이 일주일간 나눈 대화의 전부였다. 첫 일주일 동안 나는 입에서 단내가 날만큼 아무 말도 안 했고 핸드폰 숫자 자판이 닳아서 숫자가 안 보이도록 미니 게임 천국을 했었다.
참 고독했었다. 그 뒤로도 나는 줄곧 가족과 떨어져서 살았다. 부산 기계 공업고등학교 구석에 있던 기숙사. 처음으로 부산을 떠나 대학생활을 했던 수원 율전동. 방위 산업체 근무지는 경기도 시흥시 정왕동 시화공단. 불현듯 떠난 1년 간의 말레이시아 선교. 그리고 지금은 콜롬비아 구석에서 살고 있다. 그래서 내 인생의 절반 가량을 가족과 떨어져서 살았다.
가족끼리는 가끔 봐야 사이가 좋다는 말이 있다. 매일 보면 서로 싸우고 또 서로 지겹다. 하지만 나는 고등학교 이후 가족과 함께 있었던 시간은 다 합쳐봐야 1년이 안된다. 이 정도면 '정'도 생기기 어려웠다. 가족끼리 있으면 단란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서로에 대해 하나도 모른다. 그렇다. 인생은 혼자다.
기계 선생님들과 자주 찾는 엠빠나다 집. 한번 먹으면 3000페소, 한국돈 1000원쯤 나온다.
이제 콜롬비아에서 산지 8달이 되었다. 자취 및 기숙사 생활 12년 차. 자취만 똑 떼어놓고 계산해 봐도 약 7년이다. 그러다 보니 이제 자취 9단, 주부로는 아마, 아마 7단쯤 될 테다. 공과금 내는 삶. 밥 차려주는 사람이 없는 삶. 청소해주는 사람이 없는 삶. 퇴근하면 어두운 집에 들어가 내 손으로 거실 불을 켜야 하는 삶은 익숙해졌다. 갑자기 불법 급 커브 하는 느낌이지만 콜롬비아의 자취생은 어떻게 사는가 적어볼까 한다. 특히 철저하게 금전적인 부분에 관해서 말이다.
먼저 이걸 쓰기 전에 참고하셔야 할 사항은 나는 '짠돌이'라는 것이다. 우리 할아버지, 외할아버지의 공통점이 두 가지가 있다면 탈모와 스크루지 같은 동네 유명 짠돌이셨다는 점이다. 그래서 난 "공짜 좋아하면 대머리"라는 예시로 아주 적절한 사람이 되었다.
일단 난 기본적으로 미니멀 라이프라고 쓰고 대충 사는 삶, 태어난 김에 사는 삶을 추구한다. 요즘은 집 인테리어에 돈 쓰는 것이 자신에 대한 힐링, 현대 사회에 살아가는 차가운 도시 소시민의 소양처럼 구는 경향이 있지만, 나는 집 인테리어에 돈을 쓸 생각이 없다. 일단 너무 귀찮다. 집을 꾸밀 아이템을 사러 장 보러 가는 것부터 귀찮고 그걸 설치하는 것도 귀찮고 매주 그 인테리어에 쌓인 먼지를 닦아낼 생각까지 하면 벌써 진저리가 난다. 그냥 기본적인 가구에 정말 마음에 드는 포스터를 테이프 찍 뜯어다 벽에 붙이는 것이 전부다. 그리고 집 밖에서 사람들 만나면 되는 것 아닌가. 이런 거 보면 나는 확실히 차가운 도시 소시민이 되기는 글러 먹었다.
이런 곳에 와도 한국 돈 2만원이 안 든다. 어머나 세상에.
그리고 밥도 대충 때운다. 요즘 나의 주식은 다이어트에 좋다는 이야기에 챙겨 먹는 바나나, 시리얼보다 건강해 보인다는 이유로 산 그래놀라, 그리고 탄단지의 단백질을 차지하는 계란과 지방을 차지하는 아몬드, 땅콩이 전부다. 그러다 가끔 인생이 짜증 나고 내가 왜 이렇게 사나 싶은 마음이 굴뚝 들면 한국 라면이나 끓여 먹는다. 이게 전부다. 그래서 "보편적인 콜롬비아 삶"은 아닐 테지만 그래도 저는 '이렇게 삽니다.'
10월 동안 돈을 얼마나 썼는지 확인해 보았다. 약 200만 페소. 그중, 나중에 돌려받을 돈들을 빼보니 약 120만 페소를 썼다. 120만 페소는 한국 돈으로는 약 40만 원, 더 엄밀하게는 41만 6천 원 정도다. 한국 생각하면 엄청 저렴하게 살았다.
이렇게 돈을 적게 쓴 첫 번째 이유는 코이카에서 생활비와 주거비를 따로 지원해 주기 때문이다. 내가 사는 곳은 월세 550달러로 나름 중산층이 사는 곳이다. 덕분에 어느 정도 늦은 밤에도 우리 집 앞은 안전하다. 집 앞 길거리도 비교적 잘 정리되어 있다. 하지만 주거비를 지원해 주지 않았다면 꿈도 못 꿀만한 곳이다. 이 거주비의 수준은 나라마다 정말 다르고 또 파견 지역마다 또 다르다. 2년마다 주기적으로 코이카에서 각 나라, 지역별 거주비와 생활비를 조사한다는데 대충 인터넷 검색으로 잠깐 조사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어떤 지역 사람들은 안전한 곳에서 살기에 지원해주는 거주비가 부족해서 한국 돈을 끌여다 써야 하는 반면 어떤 지역 사람들은 화장실이 세 개 있는 대 저택에서 살기도 한다. 나는 운이 좋게도 적당히 혹은 그보다 좀 더 잘 쳐준 지역으로 파견 왔다. 덕분에 꽤 괜찮은 동네에서 살고 있다. 아마 내 인생 통틀어 가장 좋은 집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리고 돈을 적게 쓰는 두 번째 이유. 나는 출퇴근 비용이 전혀 들지 않는다. 콜롬비아 버스비는 한국보다 조금 저렴한 수준으로 2450페소(8~900원)이다. 이것도 지역마다 다르다. 왕복이면 매일 5천 페소, 월 20회 출근한다 하면 매달 10만 페소(3~4만 원)를 교통비로 허공에 날릴 판이다. 그래서 나는 집을 구할 때 근무하는 기관과의 거리를 최우선시했다. 아마 이 집 계약은 올해 내가 두 번째로 잘한 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로는 인천 공항에서 마지막 만찬으로 떡볶이와 순두부찌개를 먹은 일이다.) 여하튼 이러해서 남들보다는 좀 더 저렴하게 살고 있다. 참고해주시면 좋겠다.
교장선생님과 도밍고 씨와 먹는 7000페소짜리 점심. 그마저도 매번 얻어먹는다.
먼저, 내가 콜롬비아 살면서 가장 많은 돈을 쓰는 곳은 당연히도 혹은 애석하게도 '식비'이다. 먼저 아침. 아침은 학교에서 먹는데 학교에는 9시에 따로 아점 시간이 있다. 그때는 주에 2-3회 정도 동료 선생님들과 엠빠나다 같은 길거리 음식을 사 먹는다. 엠빠나다는 가게마다 다르지만 2000페소(약 700원)에서 3500페소(약 1300원) 정도 한다.
그리고 점심. 여기 부카라망가에서 점심은 7000페소(약 2300원)가 국룰이다. 7000페소 보다 비싼 곳은 훨씬 맛있다던가 고급스럽다던가 하는 그만한 메리트가 있어야 한다. 아니면 한 집 걸러 한 집 꼴로 있는 식당들의 피 튀기는 경쟁 속에서 살아남지 못한다. 근데 이마저도 같이 점심 먹는 교장선생님이나 교감선생님이 밥을 자주 사주신다. 나는 주에 한 번꼴로 계산하니 주당 21000페소(약 7000원) 정도 쓴다.
저녁은 앞서 말했듯이 바나나, 계란, 토마토, 시리얼로 대충 때운다. 이것들은 주로 집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정육점과 채소가게에서 사는데 여기서는 파운드 단위로 가격을 적어뒀다. 여기서 1파운드는 453.592그램이라는 아주 요상하고 빌어먹을 미국 단위이다. 하지만 다행이게도 내가 가는 이 가게도 이 요상한 단위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1파운드를 그냥 500그램으로 퉁쳐서 쓴다. 그래서 킬로당 가격으로 계산하려면 X2 만 하면 된다.
먼저 가장 중요한 돼지고기. 이 정육점은 돼지고기도 소고기도 가격이 통일되어 있다. 1파운드(더 정확히는 500그램)에 6-7000페소. 그렇게 부위가 자세하게 나뉘어 있지 않지만, 앞다리, 등심, 삼겹살, 사태 이런 부위를 전부 퉁쳐서 뭐든 6-7000페소에 판다. 1kg에 12-14000페소, 한국 돈으로 계산해 본다면 100g에 500원도 안 하는 셈이다. 아주 돼지 되기 좋은 환경이다.
그리고 야채는 그날그날 가격이 다르다. 한국의 수산 시장처럼 거지 같은 싯가 시스템은 아니지만 매주 매주 가격이 다르다. 오늘 사온 바나나는 500그램에 1100페소, 토마토는 1200페소. 파는 1000페소. 양파는 1050페소. 하나하나 한국돈으로 따져보면 터무니없게 싸다. 양팔 빠져라 무겁게 채소를 사도 15000페소, 한국돈 5000원을 넘기기 쉽지 않다. 다시 말하지만 돼지 되기 참 좋은 동네이다.
당근은 잘 안먹지만 사진은 잘 나오니까 한 컷.
왼쪽은 소고기 오른쪽은 돼지고기. 부위마다 가격이 다르지만 소고기가 더 싸다니!
다음은 Servicio. 공과금이다. 여기서 내가 내는 공과금은 휴대폰, 인터넷, 물, 가스, 전기 이렇게 총 5가지이다. 콜롬비아는 공과금 시스템이 독특하다. 사는 지역에 따라 '에스트라또estrato'라고 하는 레벨이 있는데, 이 레벨에 따라서 차등해서 공과금 가격을 매긴다. 가장 낮은 에스트라또 0, 1에서는 원가보다도 낮은 가격을 매기고 에스트라또 6,7은 0,1 보다 수십 배 높은 가격을 부과한다. (에스트라또가 없는 지역이 있는데 그곳을 0이라고 통상적으로 부른다.)
나는 에스트라또 4에 거주하고 있다. 아마 일반적인 콜롬비아 중산층 정도라고 생각하시면 된다. 먼저, 핸드폰 요금은 에스트라또랑은 상관이 없다. 나는 15일에 전화 무제한, 데이터 2GB인 패키지를 2만 페소에 사서 쓰고 있다. 그래서 한 달에 핸드폰 비용으로는 4만 페소, 약 13000원 정도 쓴다.
인터넷은 에스트라또에 따라서 가격이 다르지만 속도에 따라서도 가격이 다르다. 나는 한 달에 약 5만 페소짜리 인터넷을 사용하고 있다. 그렇게 비싼 인터넷이 아닌데도 한국에서 쓰던 속도처럼 빠르다. 다른 콜롬비아 단원들의 이야기를 듣기로는 10만 페소 이상은 써야지 쓸만한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다고 들었다. 아마 인터넷 회사에서 내 인터넷을 잘못 설치해 준 것이 아닐까 하는 합리적 의심이 들지만, 이렇게 좋은 것은 그냥 좋게 좋게 조용히 넘어가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현재 지금은 14만 페소가 나온다. 인터넷 회사가 8달 만에 드디어 알아차렸다.)
나머지 물, 가스, 전기 공과금은 다 합쳐서 20만 페소 정도 나온다. 다행히도 부까라망가는 에어컨이 필요할 만큼 덥지도 따뜻한 물을 많이 써야 할 만큼 춥지도 않다. 그래서 물, 가스, 전기 모두 다른 지역에 비해 적게 쓰고 있고 따라서 요금도 조금 나오는 편이다. 내야 되는 공과금은 전부 다 합치면 27-30만 페소 정도로 한국돈으로 치면 10만 원 조금 안 되는 돈을 공과금으로 쓰고 있다. 다른 단원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으면 천차만별이다. 어떤 선생님은 50만 페소를 넘게 쓰시는 반면 어떤 선생님은 20만 페소도 안 나온다고 한다. 왜냐하면 에스트라또에 의한 차이가 크기 때문이다.
매달 내는 공과금들. 왼쪽부터 순서대로 가스, 전기, 물. 여긴 가스보다 깨끗한 물이 더 비싸다.
마지막으로는 기타 비용. 여기는 공산품이 한국에 비해 특별히 저렴하지는 않다. 오히려 몇몇 상품은 더럽게 비싸다. 여기 와서 다이소가 얼마나 삶을 윤택하게 해 주는지 매일매일 느끼고 있다. 콜롬비아는 다이소의 은총이 필요하다. 한국에선 쉽게 1000원이면 구할 물건들, 예를 들자면 얼음 트레이 같은 것들을 가게에서 몇만 페소에 팔 때면 한국은 안 그리워도 다이소는 격하게 그립다. 그리고 그 물건을 들고 정말 사야 할까라는 고민을 몇 분간 고민하게 된다. 그리곤 고민 끝에 내려놓고 애통해하며 가게를 나온다. (스크루지의 유전자를 도저히 이길 수가 없다.)
그 외에도 가끔 나에 대한 투자라는 생각으로 깜짝 놀랄만한 큰 물건들을 사곤 한다. 이번에 월급이 들어왔을 때는 20만 페소짜리 컴퓨터용 의자와 20만 페소짜리 모카포트를 질렀다. 그 외에는 크게 돈 쓸 일이라곤 여행 정도이다. 이렇게 돈이 차곡차곡 쌓이다 보니 벌써 통장에 숫자가 꽤 많이 찍혔다. 한국 돈으로는 보잘것없는 돈이지만 여기는 숫자가 세배가 되니 꽤 커 보인다. 이 돈들은 요즘 나의 자존감의 원천이다. 역시 부유하면 자존감이 올라간다.
코이카 콜롬비아 단원은 한 달에 생활비로 610달러를 받는다. 콜롬비아 페소로는 200만 페소 정도 된다. 지역마다 다르긴 하지만 한 달 살기에는 충분한 돈이다. 여기 와서 부족한 것이라곤 한국 음식, 한국에서 안 사 와서 뼈저리게 후회하는 MSG미원뿐이다. 내가 일하는 학교에서 선생님의 평균 월급은 약 180만 페소쯤 된다고 한다. 심지어 이 돈은 다른 학교에 비해서 넉넉히 챙겨주는 편이라고 한다. 하지만 180만 페소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래서 선생님들은 남는 시간 짬짬이 파트타임으로 일하신다. 결혼을 했다면 맞벌이는 기본이다. 나는 집값 빼고도 100만 페소를 쓰지만 가족이 있고 자식이 있고 게다가 집값도 낸다면 180만 페소는 매일 생존도 힘든 돈이기 때문이다.
과외선생님과 콜롬비아 사회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하다가 빈곤율에 대해서 말이 나왔다. 콜롬비아 사람들의 평균 월급 통계에 의하면 2018년 작년 한 달에 100만 페소보다 못 버는 사람이 콜롬비아 전체 인구의 66%라고 한다. 3명 중의 2명 꼴로는 100만 페소도 못 버는 빈곤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이다. 2007년 자료와 비교하면 상황이 얼마나 나빠져 가는지 알 수 있다. 2007년에는 100만 페소보다 못 버는 사람이 54%, 100-200만 페소를 버는 사람이 29%였다. 그리고 1000만 페소 이상 버는 사람은 1%도 채 되지 못했다. 하지만 2018년에는 100만 페소보다 못 버는 사람이 66%로 늘었고, 100-200만 페소를 버는 사람이 18%로 1/3이나 감소했다. 그리고 1000만 페소 이상 버는 사람은 5%로 증가했다. 11년 간의 인플레이션까지 고려한다면 이는 단순 수치보다 더 상황이 나쁜 것이다.
콜롬비아의 중산층은 없어지고 점점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다. 이 기세면 부자 아니면 거지가 될 날이 멀지 않았다. 진지한 이야기는 여기서 끝맺어야겠다. 생각보다 너무 길게 적어 버렸다. 아무튼 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잘 살고 있다. 돈 걱정 없이 특히나, 먹을 것 걱정 없이. 오직 돼지 될까만 걱정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