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ankim Jan 07. 2020

호환마마보다 무서운
콜롬비아 미용실.

19년 11월 15일




  콜롬비아 와서 한국을 그리워하는 순간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떡볶이 레시피에 콜롬비아에는 없는 MSG 미원이 있을 때. 엄마가 해준 정구지 찌짐이 먹고 싶을 때. 늦은 밤 편의점에서 컵라면에 삼각김밥이 먹고 싶을 때. 친구들과 돼지국밥을 먹고 피시방 가던 게 생각날 때 정도. 한국 음식과 내 사람들 외에는 한국이 그다지 그립지 않다. 여기가 너무 좋다. 하지만 한 달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한국이 너무나도 그리울 때가 있다. 그땐 200만 원 하는 비행기를 타고 가고서라도 한국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다. 그때는 바로 머리 깎아야 할 때다.




  전에도 한번 미용실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지만 콜롬비아의 미용실은 해병대 캠프처럼 치과 신경치료처럼 '인생이 너무 편하다 싶을 때 정신 차리기 위해 시련받기 위한 용도'로 참 좋은 곳이다. 특히나 나한테는 더더욱 그 시련이 짙다.


  먼저, 한국의 미용실과 여기 미용실은 완전히 다르다. 그 이유는 먼저 주류 헤어스타일이 다른 탓이 크다. 난 헤어스타일에 대해서 그렇게 민감한 사람은 아니지만 여기는 전반적으로 머리가 매우 짧다. 대부분 콜롬비아 사람들은 강호동처럼 짧은 모히칸 스타일로 머리를 깎고 다닌다. 그래서 남자 머리를 깎을 때 가위보다는 바리깡이다. 머리 정수리에만 조금 긴 머리가 있고 나머지는 짧은 수염처럼 다 밀어버린다.


저런 닭 볏 같은 머리가 여기서는 멋의 최고봉.


   콜롬비아의 정서는 남자는 상남자 같아야 잘생겼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남자 다운 짧은 머리를 선호하고 그게 또 멋진, 잘생긴 머리라고 한다. 그에 반해 한국은 그런 머리가 대중적이지 않지 않은가. 나는 심지어 그런 머리를 고등학교 이후 해본 적이 없다. 난 잘 안다. 나의 두상상 그렇게 머리 깎으면 정말 북쪽 수령님이나 강호동처럼 돼버릴 것을. 인생에 이제 결코 없을 헤어스타일이다.




  문제는, 여기는 다 그런 모히칸 스타일로만 머리를 깎으니 다른 머리는 어떻게 깎는 줄 잘 모른다는 것이다. 미용실에 내가 들어서는 순간, 미용사들의 동공이 약 진도 8.0 수준으로 흔들리는 것이 보인다. 대부분 나에게 말을 걸지 않길 바라는 눈빛으로 외국인인 나를 경계한다. 내가 머리 깎으러 왔다고 스페인어로 말하면 그때서야 미용실 분위기가 다시 온화해진다.


  하지만 그 온화해진 분위기는 약 10초를 넘기지 못한다. 내가 깎고 싶은 스타일이라고 핸드폰에 사진을 띄어 보여주기 때문이다. 나는 그냥 투블럭을 원할 뿐이다. 하지만 이 사람들은 이걸 어떤 스타일인지도, 심지어 이 스타일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도 모를 거다. 그렇지만 또 다들 왜 그렇게 자신감이 넘치는지. 눈과 손은 다시 진도 8.0으로 흔들리건만 이렇게 깎아줄 수 있다고 호언장담을 한다.




  그때부터는 그 누구도 마음 편하지 않는 시간이 찾아온다. 나는 계속 이 사람을 믿어도 될까 곁눈질로 노심초사한다. 미용사는 계속 도구를 이리저리 바꾸기 시작한다. 바리깡을 들어서 몇 초간 머리를 갈아내다 다시 가위로 바꾸는 식이다. ('갈아낸다'가 어울릴 정도로 거칠게 머리에 문댄다. 꼭 감자칼로 도려지는 감자가 된 기분이 든다.) 


  그리고 어찌나 긴장을 하는지 떨리는 손으로 연거푸 분무기로 머리에 물을 뿌린다. 그 물은 넘쳐서 내 얼굴을 타고 흐른다. 아쉽게도 나는 식물도 아닌데. 콜롬비아 사람은 물로 느닷없이 세수하는 것을 좋아할지도 모르지만 난 좋아하지 않는다. 상반신 절반을 젖게 할 기세로 분무기 물을 뿌리는데 그 물에서 맡아본 적도 없는 남영동의 물 비린내가 살짝 나는 것 같기도 한다. 그렇게 뜻하지 않은 상반신 샤워 중에도 미용사는 긴장하며 머리를 깎는 일은 멈추지 않는다. 이쯤 되면 나도 포기하고 눈 질금 감고 '괜찮다. 다 괜찮아질 거다.'라고 주문을 되뇐다.


콜롬비아 시위도 무서운 것 중 하나. 그릇을 '깡깡' 두드리며 지나간다.




  안타깝게도 이 주문은 마음의 평화는 줄지언정 결코 머리 결과가 좋게 나왔던 적은 없었다. 게다가 빗질을 하면서 가위질을 해주는데 이때쯤이면 실은 '내가 고문당하는 중'이라는 걸 눈치챈다. 내 두피의 강도를 측정하려는 것인지 혹은 내 두피에 콩이라도 심으려고 도랑을 내려는 건지. 뾰족한 꼬리빗으로 사정없이 내려 찍으며 내 머리에 쟁기질을 한다. 피가 나야 이 사단이 끝나는지, '우리 비밀 기지가 어디 있는지 불어야' 끝나는 건지, 아니면 '내가 모든 사건의 배후라는 것을 고백해야' 이 고문이 끝나는지 알 수가 없다. (혹시 고문 전문가가 있다면 꼬리빗으로 머리 쌔게 빗어주기를 새 고문으로 추천한다. 아마 30분도 버티지 못할 거다.)


  그렇게 나는 세상에서 가장 편한 의자에서 물고문과 두피 고문을 몇십 분 당하면 비로소 머리는 완성된다. 이런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건만 언제나 머리가 마음에 들었던 적은 없었다. 하지만 언제나 이 순간이 끝나면 빨리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 그냥 머리 모양을 거울로 보여주는데 보는 둥 마는 둥 좋다 무이 비엔Muy bien 땡큐를 외치고 돈 내고 황급히 도망친다. 도망치는 길에 두피를 싹 만져본다. 머리에는 다행히 피는 안 난다. 매번 이 수모를 당하면 한국에서 받았던 치과 신경치료가 생각난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신경치료는 일 년에 한 번 할까 말까 하지만 미용실은 매달 가야 한다는 것이다. 빌어먹을. 죄송하지만 진짜 빌어먹을 비렁뱅이 같은 일이다.  




   콜롬비아에서 빌어먹을 일이 나와서 하는 이야기인데 이에 못지않게 나를 괴롭히는 것은 바로 바 선생님 바퀴벌레다. 콜롬비아의 동식물들은 대자연의 축복을 받았는지 전부 거대하고 수도 많다. 그래서 대체로 끔찍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놀랍고 끔찍한 대자연의 축복이 바 선생에게 피해 갔으면 좋았을련만 안타깝게도 그런 일은 생기지 않았다.


  여기 바 선생들의 특징은 건실하게 생겼다는 것이다. 크기도 아주 크지만 속도도 빠르다. 특히나 바퀴벌레가 날 수 있는지 없는지는 아주 아주 중요한 사항인데 이 선생들은 거의 '새'로 봐도 무방하다. 왜 이렇게 잘 아느냐 하면 우리 집에 벌써 두어 번이나 방문했기 때문이다. 그때 그 공포는 아직도 눈만 감으면 생생하게 떠오르고 온 몸에 소름이 돋는다.


우리 집에 들어온 새끼 도마뱀. 브루니라 이름을 지어주었다.


  나는 그때도 지금처럼 이렇게 글 쓰느라 반쯤 정신 나간 사람처럼 쓰디쓴 커피와 함께 키보드를 두들기고 있었다. 정말 집중해서 글 쓰는 중에 귓가에 벌? 새? 같은 것이 날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다시 생각해보니 두두두두 하던 게 헬리콥터스럽기까지 했다.) 무심코 옆을 돌아봤더니 그 옆에는 '새' 혹은 '용'에 가까운 바 선생 한 분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아서 그런지 그 이후의 상황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가 엄청나게 높은 고성의 비명을 질렀다는 것. 그리고 용수철이 튀어나가듯 의자를 박차고 나갔던 것. 그리고 용과 싸우는 기사가 된 듯 빗자루를 들고 용감하게 대적했다는 것. 그리고 철저하게 패배해서 패잔병이 되어 황급히 안방으로 피했다는 것 정도 기억에 남았다. 그리고 아무리 기억해봐도 난 그 용을 죽이지 못하고 그대로 안방에서 잠들었다.


  그래서 지금 이 바퀴벌레는 어디 있는지 바퀴벌레만 알고 있다. 부디 제발 우리 집에서 나간 것이었다면 좋겠다. 다행히도 그 사건 이후로는 그 바 선생님을 다신 뵙지 못했다. 혹시 같이 살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면 온몸에 털이 솟구친다. 우리 집에 그만 계시고 바 선생님 제발 안전귀가하신 것이면 좋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나를 괴롭히는 건 지진, 정확하게는 지진에 대한 공포이다. 지진을 여기 와서 벌써 수 번 느꼈다. 거의 한 달에 한 번꼴로 지진을 느끼고 있다. 과외 선생님 세일라는 이곳이 세계에서 지진이 가장 많이 일어나는 곳 중 하나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게 자랑거리면 안될 것 같지만 너무 자랑스럽게 말해서 반문조차 못하고 축하한다고 말했었다.


  저번 달에는 정말 크게 움직여서 아파트 전체가 휘청이는 느낌이 들었었다. 검색해보니 그게 진도 6 정도의 지진이었다. 한국에 살면 인생에서 한번 느낄까 말까 하는 지진을 여기서 미용실 가듯 느낀다. 처음엔 신기했지만 지금은 무섭다. 그래서 우리 집 출입구 한 켠에는 비상시 들고나갈 수 있는 응급키트를 두었다. (내가 자발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고 코이카에서 나누어준 것이다. 코이카 최고.)


파란 점은 우리 집. 빨간 점은 지진이 일어난 곳. 무려 그저께입니다.


  그리고 우리 집 냉장고 옆에는 재난을 알려주는 경보기도 설치해 뒀다. 지진, 가스 누출 등에 알람이 울린다고 설명서에 적혀 있었는데 아직 단 한 번도 울린 적이 없다. 심지어 진도 6.0 지진이 왔을 때도 이 녀석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아마도 보통 지진에는 작동되지 않나 보다. 저 알람이 울릴 정도의 지진이면 이미 지진으로 건물이 무너지고 있는 중이 아닐까 싶다. "그땐 이미 알람이 필요 없는 거 아닌가?"란 생각이 들지만 아마 누군가는 죽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알람 소리를 듣고 싶을 수도 있을 테니 디스는 이쯤에서 그만하겠다.


  또 무서운 건 지진이 일어날 때마다 집안 구석구석 금이 생긴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없었던 금이었는데 이제는 A4지가 들어갈 정도로 틈이 벌어졌다. 집 창문 밖으로 보이는 아파트 외벽도 금이 크게 났는데 곧 한쪽 외벽이 뜯어지는 진기한 광경을 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이역만리 지구 반대편에서 설마 지진으로 죽겠어라는 두렵고 안일한 생각으로 요즘 살고 있다. 미용실에서 고문으로 죽든 바퀴벌레와 싸우다 죽든 혹은 지진으로 죽든, 뭐 죽는다면 그래도 콜롬비아에서 열심히 잘 살려 노력했다 기억해주신다면 좋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콜롬비아 물가 : 한 달에 60만 원으로 살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