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년 12월 07일
19년 12월 07일
요즘 유튜브로 세상을 본다.
아니 유튜브로 호적을 옮겼다고까지도 말할 수 있다. 하루에 몇 시간이나 유튜브를 보는 걸까. 그 시간에 스페인어 공부를 했으면 진작 원어민 뺨은 못 치더라도 우리 학교 1학년짜리 학생들 뺨은 찰지게 쳤을 텐데. 그 시간에 운동을 했으면 마동석만큼은 아니었어도 이 생닭 같은 몸에서는 벗어났을 텐데. 그 시간에 글이라도 썼으면 일주일에 서너 편은 휘갈겨 썼을 텐데.
언제나 후회하지만. 또 언제나 후회는 생각으로 그친다. 지금 방금까지도 유튜브를 보다 왔으니 말이다. 유튜브에는 볼게 얼마나 많은지 봐도 봐도 새로운 것이 또 기어코 나온다. 볼걸 다 봤다 싶으면 유튜브는 "너 이런 거 좋아하지?" 하면서 새로운 영상을 추천해준다. 유튜브 신, 구글 신은 얼마나 위대하신지 내 머리카락 수는 다 못 헤아려도 내 취향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헤아린다.
그렇게 유튜브를 보다 보면 한두 시간 또 훌쩍 지나있다. 전국적인 시위로 오늘 하루 종일 가택에 감금되어 있었지만 시간은 벌써 뚝딱 흘러 오후 4시. 이렇게 시간 가다가는 금방 한국으로 돌아가고, 금방 백발노인이 되겠다. 물론 스페인어는 여전히 떠뜸떠뜸. 이 뱃살도 여전한 채로 말이다.
요즘 죽어라 유튜브를 보다 보니 별에 별걸 다 본다. 근래 유명하다고 하는 유튜버 영상은 다 챙겨보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얼마 전에 유튜브에 업로드된 JTBC 예능 크라임씬도 한편 두 편 보다니 다 봤다. 게다가 요즘 비의 뮤직비디오 "깡"에 빠졌다.
'한국 다람쥐, 한국 다람쥐' 하면서 시작하는 이 노래는 비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가 하는 자기 자랑과 떠나간 사랑을 잊지 못하는 순정남적인 면모, 태양을 싫어하던 시절 보여주던 춤과 비의 트레이드 마크인 꾸러기 표정, 마지막으로 돈 자랑을 비판하는 가사와 정 반대로 돈을 자랑하는 뮤비 내용을 통해 보여주는 수준 높은 자가당착까지.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는 21세기 한국 연예계의 큰 쾌거라고 할 수 있는 노래이다. 안타깝게도 나온 지 2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이 노래의 존재를 알았다. 그래서 나의 낭비한 세월이 너무 아쉬워서 요즘은 꾸준히 1일 1깡을 하고 있다. (여러분들도 인생 낭비를 그만하시고 빨리 1일 1깡을 권장하는 바이다.)
그리고 나영석 PD의 차기작인 라끼남 '라면 끼리먹는 남자'도 챙겨 보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국민 MC 강호동이 라면 먹기 최적의 장소로 가서, 최적의 컨디션으로, 최고의 재료들로, 최고의 라면을 '끼리'먹는 아주 단순한 프로그램이다.
하지만 이건 명백히 예능 치트키이다. 라면이 가장 먹고 싶은 밤 10시 40분에 세계에서 가장 맛있게 라면을 먹는 남자가 제일 맛있는 라면을 먹는 프로그램이다니. 나와서 안될 악마의 먹방 프로그램이 나왔다. 나 같은 불쌍한 해외 노동자는 도저히 버틸 수가 없는 프로그램이다. 이걸 보다 보니 벌써 추석 때 코이카 격려품으로 받은 라면 몇 개를 순식간에 작살내 버렸다.
그렇게 흐르는 침을 휴지로 닦으면서 이 프로그램을 보는데 그 와중에 강호동이 정말 인상적인 이야기를 했다. 강호동이 말하길 2019년 시작하면서 정한 목표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어떤 것과도 행복과는 타협하지 말자"라는 것이다. 그 누구보다 행복하게 라면에 밥을 말면서 한 이야기라 더더욱 인상적이었던 그 말은 내 마음속에 드릴처럼 파고들었다. "나는 지금 행복한가?" 그래서 저번 주에는 글을 쓰지 않았다. 저번 주만큼은 글 쓰는 게 행복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언제 행복할까?" 글도 안 쓰고 고민해봤다. 행복한 순간을 꼽아보면 정말 많다. 먹을 때, 잘 때, 놀 때, 깡 뮤직비디오를 볼 때, 수도 없이 많다. 하지만 "무슨 일을 하면 행복할까?" 생각하니 숨이 턱 막히기 시작했다. 월급을 받을 때 빼곤 일 때문에 행복했던 적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내 인생 첫 일은 아버지가 다니는 공장에서 아르바이트로 했던 전선 까는 일이었다. 할 일은 굉장히 많았지만 어느 중소기업이나 마찬가지로 적은 수의 사람을 갈아 넣어서 돌아가던 회사였다. 나는 기술 없는 일개 학생 나부랭이. 그저 하루에 약 삼십이만오천육백사십여개씩 전선을 깟다.
그리고 전선을 까지 않는 날이면 아버지와 함께 출장 다니면서 "그거랑 그거랑 붙여서 저거랑 같이 줘."라는 말을 잘 해석해서 가져다 드리는 일을 했다. 그때 일하던 내내 엄지손톱에 보라색 멍이 들어 있었다. 한 달에 60만 원을 받는 대가로 받은 지울 수 없는 매니큐어였다. 난 보라색을 좋아했기에 그런대로 봐줄 만한 매니큐어였다.
그다음은 시화공단에서 일했었다. 지금은 이 방향으로 오줌도 누지 않는다. 공장 이층 구석에서 하루에 파이프를 육만오천삼백이십여개씩 잘랐다. 공장 이층은 지붕이랑 가까워서 여름에는 공짜로 전통 장작불 한증막에서 찜질을 하며 파이프를 자르는 느낌이었고 겨울에는 냉동 창고에서 파이프가 아닌 냉동 참치를 자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노동요의 일종으로 귀가 찢어져라 크게 라디오를 틀어줬었는데 파이프를 자르는 소리가 너무 시끄러워서 라디오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대부분 청각장애를 앓으신 분들과 일했다. 청각뿐 아니라 고된 노동으로 인간성과 일종의 싸가지까지 잃어버린 공장 2층 좀비 노동자들과 일하는 것은 손톱에 보라색 매니큐어를 칠하며 아버지의 암호를 해독하던 일을 아름답게 미화시켜 주었다. 하지만 군대 대신 일하는 것이었으므로 감사해하며 묵묵히 파이프를 잘랐다.
그 외에도 여러 일을 했다. 아줌마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4100원짜리 깜장색 쓴 물을 눈웃음과 함께 팔던 일. 학교에서 예산, 돈에 관련된 종이들에 둘려 쌓여서 무작위로 쌓인 서류들을 일렬 번호대로 정리하던 일. 지금은 생판 모르는 언어로 기계를 가르치는 일까지. 생각해보면 정말 별일을 다했다. 하지만 이 일이 나의 천직. 나의 행복이라는 생각은 든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문뜩 보였다. "Do what you love". 매일 입고 다니는 깜장 티셔츠에는 하얀 글씨로 이렇게 적혀있었다. 단 한 번도 제대로 읽지 않고 생각하지 않고 입었던 옷이었는데 오늘따라 눈에 들어왔다. 이 5천 원짜리 면티조차 나에게 면박 주고 있었다. '네가 사랑하는 일이 뭐야? 네가 그래서 하고 싶은 일이 뭔데? 넌 뭘 하면 행복한데?' 29년 살았건만 쉽게 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가증스럽게도 5천 원짜리 면티에게 제대로 구박을 받았다.
나는 무슨 일을 하면 행복할까? 아무리 생각을 해도 답이 안 나온다. 일과 행복은 양립할 수 없는 것일까? 그래서 먼저 내가 정말 하기 싫은 일들을 하나하나 나열해 보기로 했다.
나는 먼저 남들 앞에 나서서 발표하는 것은 질색한다. 29년째 살아온 발표 포비아의 삶. 남들은 나보고 어떻게 능구렁이처럼 발표를 잘하느냐 묻지만 그 발표들은 대학시절 내내 단련되어버린 발표 근육 덕분이었다. 실은 발표대 뒤 보이지 않는 다리는 후덜후덜 거리고 있고 잘 들어보면 목소리도 염소처럼 메에에 거린다.
그리고 모르는 사람과 친한 척 대화하는 것도 사양하고 싶다. 특히나 그 사람이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면 더더욱 싫다. 억지로 갖추어진 예의, 불편한 옷과 불편한 신발, 불편한 웃음으로 즐거운 척 이야기를 할 바에 차라리 파이프를 육만오천삼백이십여개씩 자르는 편을 택할 테다.
그리고 뭐니 뭐니 해도 제일 싫은 것은 내가 소모품처럼 사용되고 버려지는 곳이다. 이게 싫어서 남들 다 옳다던 그 길을 버리고 지금 이렇게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결국 이것저것 다 싫다. 내가 행복하게 일 할 수 있는 곳은 지구 상에는 아니 우리 은하에는 있을까.
그나마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뭘까 따져보면 아주 가증스럽게도 '착한 일'이다. 남들에 도움이 되는 일. 돌려 말하면 돈이 안 되는 일들이다. 그래서 코이카로 왔다. 하지만 참 어렵다. 간사하다. 왜냐면 돈돈돈. 돈 때문이다.
막상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며, 남들의 눈치와 편견 시선에서 벗어나서 살겠다며, 당찬 포부로 코이카로 봉사 왔건만. 와서는 계산기를 들고 학자금 대출, 부모님 노후, 보험비를 이리저리 계산해보며 짱구를 굴린다. 계산기를 굴려보면 도저히 답이 안 나온다. 아 그때 그냥 남들처럼 기성품이 되어버린냥 가판대에 내 몸을 올려놓고 대기업에 원서 넣고 평범하게 살걸 그랬나. 취업시장이라는 컨베이어 라인에서 불량품처럼 도망쳐 나왔지만 지금이라도 마음 고쳐먹고 다시 컨베이어 라인에 들어가야 하나. 결국 이 세상에 백기 투항하고 내 밥그릇을 챙겨야 할까.
결국 다들 이것이 문제다. 다들 기성품처럼 살아야 할지. 아니면 나의 자아를 충족하는 삶을 살지. 다들 이 중간에서 이리 갈지 저리 갈지 고민하고 있을 거다. 벌써 12월 초다. 콜롬비아 생활도 1년 차 다되었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갈 시간도 다가온다.
이렇게 시간은 참 빠른데, 세월은 흘러 흘러가는데, 나는 나를 아직도 잘 모르겠다. 생후 336개월 동안 나에 대한 심도 깊은 질문 없이 살아서 받는 형벌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흘러 흘러 어디로 가게 될까. 유튜브에서 시간을 그만 쏟고 나에 대해서 공부해야 해야 하건만 그러기에는 워크맨은 너무 재밌고 한국 다람쥐는 계속 듣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