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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kim Apr 09. 2020

1년 동안 강산은 안 변해도
나는 많이 변했구나

20년 02월 29일




  와...

  벌써 1년이 되었다. 콜롬비아 이 낯선 땅에 떨어진 지도 말이다. 참 복잡 미묘한 심경이다. 1년을 돌아보면 길었던 것 같기도 하고 순식간에 지나간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잘 보낸 것 같으면서도 참 대책 없이 흘려보낸 것 같기도 하단 말이지. 그래도 아직 별 큰 일없이 내 목숨 하나 잘 간수했으니 나름 선방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1년 전. 보고타에 떨어졌던 그때. 콜롬비아 시간으로 2019년 2월 27일 새벽 5시였다. (아직도 내 핸드폰에는 그때의 e-ticket이 있다.) 5시 25분에 도착한다던 그 비행기는 무려 예정보다 30분이나 일찍 보고타에 도착했다. 2년 만에 다시 떨어진 콜롬비아는 내가 떠나던 그때와 똑같았다.


  달라진 건 그때 나는 아무것도 모르던 나 홀로 여행객이었고, 이번에는 코이카 동료 선생님들과 나를 환영해주는 코디님들이 함께 있었다는 것이 달랐다. 보고타의 공기는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지만 아주 서늘하고 건조해서 숨을 크게 들이켜니 페가 말라가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렇게 외딴 땅에 떨어진 후 1년. 1년 동안 강산은 안 변했지만 나는 꽤 변했다. 첫 번째는 나의 생활이 완전히 바뀌었다. 다르게 말하자면 나의 돈 씀씀이가 크게 달라졌다.


  그때는 한국 물가에 푹 젖어있었던 시절. 콜롬비아는 소비의 천국처럼 보였다. 비싸 보이는 카페를 가도 2000원도 하지 않던 아메리카노. 한국에서는 메뉴판을 확인해보고 호다닥 도망쳐 나왔을 고급 식당이 한 끼에 만원, 이만 원. 나는 '돈 이렇게 펑펑 써도 괜찮아. 얼마 안 하잖아.'라는 재수 없는 소리를 해대곤 하던 외국인이었다.


매일 먹는 3000페소(1000원)짜리 아침과 점심 메뉴판. 비싸봐야 10000페소 한국 돈 4000원 아래다.



  하지만 지금 나는 세미-콜롬비아 사람으로 바뀌었다. 이제는 15000 페소, 약 5000원쯤 하는 식당에도 호다다닥 놀랜다. 머릿속으로 이 돈이면 돼지고기 배 터지게 꾸어 먹을 수 있을 텐데 계산하고 앉아 있다. 그래서 웬만하면 저렴한 로컬 식당 아니면 집에서 만들어 먹고 있다. 2000원 하는 커피도 이제 비싼 커피. 길거리 200원 하는 띤또로 내 몸에 카페인을 충전한다.




  그래서 생활 반경도 바뀌었다. 아직 외국인 물이 덜 빠졌을 때의 나는 낯선 정육점이나 채소 가게를 가기 무서워했다. 가면 날 잡아먹는 것도 아니지만 새로운 도전이라는 게 원래 덜컥 무섭지 않은가. 왠지 로컬 가게에 가면 외국인이라서 관심도 많이 받을 것 같고, 스페인어 못한다고 쪽 당할 것 같아서 겁이 났다. 그래서 아무도 나에게 관심 없는 대형 마트에서 비싼 물건을 담곤 했다.


2500원이면 이런 고기를 구워 먹는데 왜 사 먹겠어.


  하지만 지금은 마트에 웬만하면 가지 않는다. 마트에서는 쌀 하나 사려해도 20-30분씩 줄 서야 하고 심지어 같은 물건도 집 앞 슈퍼가 더 싸다. 세상에 이렇게 비효율적인 공간이 있다니. 한국도 그렇지만 서서히 마트의 종말이 다가오고 있다. 그래서 마트 대신 어디에 뭐가 싼 지 훤히 꿰고 있다. 고기는 저기 정육점, 여기는 야채가 싸고. 쌀은 집 앞 슈퍼. 아니면 창고형 마트에서 대량으로 사놓곤 한다. 겉보기엔 한국인이지만 사는 건 이제 콜롬비아 사람에 더 가까워졌다.




  그리고 1년 동안 스페인어의 실력도 나름... 아주 나름 성장했다. 1년 전 콜롬비아에 떨어졌던 그때는 딱 Hola올라(안녕), Gracias그라시아스(감사합니다.) 정도까지 알았다. 아주 형편없었다. 그때 나는 스페인어를 '이거 영어인 줄 알았는데 뭐가 좀 이상하네?' 하는 수준으로 알았다.


  그래서 처음엔 영어가 더 편했다. 신기한 노릇이다. 한국에서는 그렇게 영어를 혐오했지만 외국에서는 모르는 언어 중에 English가 있으면 사막에서 만난 오아시스 마냥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급할 때면 유창하지도 않은 영어가 먼저 나왔다. 그리고 스페인어는 하나도 못 알아먹으니 손짓, 발짓, 눈치가 대화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그때는 매일매일이 퀴즈와 생존, 모험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나름 1년 되었다고 스페인어가 좀 늘었다. 하지만 딱 5살짜리 스페인어를 구사하고 있지 않을까 싶다. 5살짜리처럼 하고 싶은 말은 문법에 안 맞아도 여체저체 말하지만 듣는 건 하나도 못 알아먹는 그런 실력. 나는 딱 그 정도다.


내 작은 스페인어 선생님들. 분명히 대화중이지만 나랑 너랑 다른 이야기 하는 것 같은 느낌인 건 착각이겠지?


  그래서 듣는 사람 속 터지기 좋은 스페인어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말만 달랑하고 상대방이 말하는 건 '그게 뭐예요? 그게 무슨 뜻이에요?'라고 반문한다. 나였으면 나랑 친구 안 했을 텐데 콜롬비아 친구들은 착해서 정말 다행이야. 




  이 정도로 밖에 스페인어를 못하건만 짜증 나게도 그 사이 영어 실력은 퇴화를 넘어서 선사시대 유물처럼 아예 그 흔적을 찾아보기가 힘들어졌다. 이제 나는 영어를 말하면 스페인어 단어들을 자동으로 쓴다. 왜냐하면 영어랑 스페인어가 같은 라틴어 계열이다 보니 단어들이 너무 유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말로 예를 들자면 '와타시가 혼또니 배고픕니다.' 이런 식으로 하느니만 못한 영어를 한다. 그래서 내 영어는 콜롬비아 사람들의 웃음 벨이 되었다.


  그리고 모국어 한국어도 이제 비슷한 속도로 퇴화하고 있다. 한국말로 이야기하다 보면 꼭 하는 말이 있다. '아... 이 단어가 한국어로 뭐더라?' 한국어를 듣거나 읽는 경우는 많지만 하루 종일 한국어 한마디 뻥끗 안 하는 경우가 많다. 하더라도 '배고파.' '졸려.' '피곤해.' 선에서 머문다. 이렇게 언어들을 잃어가건만 스페인어는 느는 게 없으니 그렇게 억울할 수 없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다가 이런 느낌일까?


  나중에 한국에서 저를 만났을 때 한국어로 어버버버 하더라도 이해해주시길 바란다. 이제 코이카 절반 지나왔는데 벌써 이런 수준이다. 대망의 0개 국어 될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그 사이 나 자체도 많이 변했다. 콜롬비아 오기 전 열정적이었던 나는 다 증발하고 없어졌다. 바닥에 찌꺼기만 남았다. 그래서 그 시작도 하기 전 세웠던 터무니없이 원대했던 계획들, 적정기술이니 사회적 약자를 위한 디자인이니 하는 것들은 무도 한번 못 썰어보고 다 포기했다.


  오기 전 꿈꾸던 나의 꿈들은 안락함이라는 벽 보다도 무서운 폭신함에 다 수포로 돌아가 버렸다. 내가 상상하던 난 이렇지 않았는데. 이번 코이카는 조졌다.


  그래도 후회는 눈곱만큼도 없다. 여전히 만족스럽다. 이런 환경에서 제대로 활동하지 못하는 내가 답답할 뿐. 매일 새로운 환경, 새로운 사람, 새로운 경험 속에서 나태하고 게으르게 흘러가고 있다.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다가오는 1년은 좀 정신 차리길 바랄 뿐이다.




  나는 여러분들의 걱정 덕분에 잘 지내고 있다. 하지만 가끔 멀리서 다른 단원 선생님께서 여러 사정으로 중도 귀국을 하신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전체 코이카 단원 중 자신의 임기 기간을 채우는 사람은 절반을 겨우 넘는다고 한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의 유명한 첫 문장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처럼 코이카도 똑같다. 잘 지내는 사람도 많지만 다들 저마다의 다른 이유로 코이카 생활을 힘들어하고 후회하신다. 코이카의 삶은, 해외 생활은 녹록하지 않다.


  사실은 나도 그렇다. 처음에 코이카에 대한 찬양은 점점 청바지 파란 물이 빠지듯 쭉쭉 빠지고 있다. 처음에는 3년도 거뜬히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지만 가끔 힘든 날, 혼자 우주를 유영하는 듯이 문뜩 무섭게 외로운 날이 온다. 그런 날이면 빨리 한국 가는 날이 오면 좋겠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여기서 한국에서 쉽게 가지기 힘든 행복 안에 매일매일 사는 건 부인 없는 사실이다. 이건 내 주변 사람들의 헌신과 배려의 덕이 크다. (특히, 나의 이기적인 스페인어에도 불구하고 친구가 되어준 콜롬비아 친구들 덕이 크다.) 모두에게 감사를. 특히 각 임지에서 고생하시는 코이카 단원들에게 응원한다. 다들 우리 부디. 살아남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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