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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kim Apr 14. 2020

콜롬비아 영화관에도 '기생충'

20년 03월 01일




  스페인어 선생님 세일라와의 과외 시간.

  나는 항상 공부하기 싫어하고 놀기 좋아하는 평범한? 학생이고 세일라는 가르치는 것보다 떠드는 걸 좋아하는 평범한? 선생님이다. 이 환장의 조합이 뭉치니 공부는 언제나 뒷전이다. 나는 공부하기 싫으니 과외 수업을 시작할 때쯤이면 흥미로운 이야기를 미끼로 슬쩍 던진다. 세일라도 내가 공부하기 싫어서 이러는 것 다 알지만 그 미끼를 덥석 물어준다. 그리고 책도 펴기 전에 수업 시간의 절반 이상을 떠든다.


 그래서 매주 3-4번 수업을 하지만 진도 나가는 것이 매우 더디다. 대신 떠들면서 많이 배운다.(고 생각한다.) 이 동네 사람들의 사투리 라던가. 어떤 단어에 숨겨진 이상한 뜻이라던가. 아니면 콜롬비아 대통령 이반 두케의 욕이라던가 말이다. 그러다 다시 수업을 시작할 낌새가 보이면 수업을 막기 위해서 이번에는 질문 공세를 한다. 내 돈 주고 내가 공부하는 건데 왜 이리 이렇게나 하기 싫을까?




  그래서 오늘 물어본 표현은 '좋아하다.'라는 표현이었다. 흔히 쓰는 'Me gusta -, 좋아하다.', 'Me encanta -, 무척 좋아하다.' 같은 표현은 이미 알지만 내가 원하는 건 더 격정적인 표현, 이것 때문에 내가 돌아버릴 정도로, 내 인생을 말아먹을 정도로 좋다는 표현은 없냐고 물어보았다.


  그래서 여러 가지 배웠다. 일단 간단한 표현인 'Yo amo - , 사랑하다', 그리고 매료되었다. 사로 잡혔다. 혹은 반했다 라는 느낌의 단어인 'Me fascina(n)'. 이것도 느낌이 부족하다고 했더니 'Soy adicto a, 중독되었다.' 그리고 'Enloqueser. 미쳐 버릴 정도로 좋다. 좋아서 미쳐 발광할 것 같다'는 표현을 배웠다. 그 이후 내 입에 붙었다. 'Me eloquece Pony Malta. 포니 말타가 좋아서 미쳐버릴 것 같다.'




아침에는 포니말타는 콜롬비아 국룰.


  Pony Malta포니 말타는 콜롬비아 음료수이다. 한국의 맥콜 같은 보리 음료이지만 그 맛은 차원이 다르다. 특히나 그 불량식품 같은 얄구진 맛의 깊이는 마리아나 해구를 넘볼 정도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넥타르가 사실은 포니 말타가 아니었을까? 포니 말타에 눈을 뜬 이후 내 인생은 둘로 나뉘었다. 포니 말타를 간절하게 원하는 시간과 포니 말타를 마시고 있는 시간 두 개로 말이다.


  포니 말타를 이제야 안건 내 인생의 축복이자 저주이다. 아마 일찌감치 알았으면 내 통장 잔고가 남아나지 않고 그만큼 내 뱃살에 지방으로 저축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만큼 더 행복한 단원 생활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학교 선생님이든, 친구들이든 이렇게 말하고 다닌다.


  '내 생각에는 포니 말타에는 코카 추출물이 들어있는 것 같다. 그렇지 않고는 이렇게 중독적일 수가 없다. 나중에 한국으로 돌아가면 포니 말타 때문이라도 다시 콜롬비아로 돌아올 거다.'라고.


  지금 쓰고 있는 이 시간에도 내 옆에는 포니 말타가 있다. 지금 소원이 있다면 포니 말타를 만드는 회사의 사장 외동딸과 결혼하고 싶다. 그래서 물 대신 포니 말타를 마시고 싶다. 그럼 그리스 로마 신화의 신들도 부럽지 않을 텐데 말이다.








  세상에 마상에.

  이런 일이 생기다니. 콜롬비아. 부까라망가. 그것도 조그마한 관 4개밖에 없는 우리 동네 영화관에서 한국 영화가 상영되다니. 이건 모두 위대하신 우리의 대 영화감독 봉준호 감독님 덕분이다.


  심지어 이 영화가 그저 구색 맞추기 용으로 상영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상을 휩쓸어서 예술영화처럼 상영되는 것도 아니라, 한국에서 외화가 개봉하듯 인기 있는 영화라서 상영관을 늘리다가 여기까지 상영하게 된 것이다. 지금도 가끔 기생충을 홍보하는 광고가 나온다. 크으으 국뽕에 취한다.


  영화 보는걸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최초로 콜롬비아에서 한국 영화가 개봉했는데 보지 않는다면 진정한 한국인이 아니지 않을까? 국뽕에 가득 차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영화관에 갔다. 가는 길에 나초와 내 사랑 포니 말타를 사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한국 영화가 콜롬비아 동네 영화관에서 상영되는 날이 오다니!




  사실, 영화하면 팝콘이지만 여기는 영화보다 팝콘이 배는 더 비싼 곳. 그래서 영화관에 과자를 사가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여러 기사에 따르면, 아직까지 콜롬비아는 영화관에 음식을 반입하는 것은 불법인 것 같다.) 영화 상영하기 전, 알바들이 좌석 안내를 해줄 때까지 다들 조용히 광고 보는 척을 한다.


  하지만 알바들이 다 나가고 영화가 시작하면 일제히 몰래 가져온 먹을 것을 꺼낸다. 나도 이 분주함에 한 숟갈 더했다. 도리토스는 역시 몰래 먹어야 맛있다.


  아무튼 나는 영화 상영 시간에 맞춰서 좌석에 앉았다. 하지만 이 빌어먹을 콜롬비아 영화관은 밀당하듯 영화를 틀어줄 듯 틀어주지 않는다. 이 광고가 끝나면 이제 영화가 시작하겠지 하면 다른 광고. 이 정도 기다렸으면 영화 틀어주겠지 하면 갑자기 단편 다큐멘터리. 영화관 에티켓을 알려주는 영상이 나와서 이제 진짜 진짜 틀어주겠다 싶지만 어림도 없지 전에 틀어준 영화 광고를 또또 틀어준다.




그래도 우리집 앞 쇼핑몰은 작지만 있을건 다있다.



  이 망할 콜롬비아 영화관. 얼마나 영화관이 관대로운지 영화 상영시간 40분 뒤에 들어와도 광고를 놓치지 않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영화 시작시간에 들어오는 사람은 하수다. 나는 그 하수 중에서도 초보자였고 근처 대학교 광고부터 다른 신작 영화, 그리고 동네 마트 광고를 심지어 까먹지 않게 두 번씩 복습하며 볼 수 있었다. 시간의 소중함을 몸소 배웠다. 아주 뜻깊은 시간이었다.


  5조억 년 같았던 오랜 기다림 뒤에 보는 영화는 더 재미있었다. 그리고 괜히 난 한국 사람이다 보니 한국 영화가 콜롬비아 사람들에게도 잘 먹히는지 궁금해서 주변 관객들의 반응도 체크하게 되었다. 특히나 인상적인 것은 지극히 한국적인 개그가 여기서도 통한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이해 못하면 어쩌지라는 나의 걱정은 기우였다.


  그러다 영화는 폭주기관차처럼 결말을 향해 달려갔다. 본 사람은 다들 알겠지만 관객들이 정신을 못 차리도록 급속도로 그리고 다양하게 전개되며 영화는 결말로 향한다. 그에 따라 영화 보는 내내 거슬리던 소곤소곤 떠들던 소리도 숨죽여졌고 부스럭거리던 과자 먹는 소리도 사라졌다.




  영화가 끝나자 다들 영화가 재밌었다는 반응이었다. 크... 나도 자랑스러웠다. '사람들 이거 우리나라 꼬레아나 영화예요!'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소리를 할 만큼 미친놈이 아니었기에 조용히 영화관을 빠져나왔다. 참 감회가 새롭다. 아마 콜롬비아 영화관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100% 이해한 영화가 되지 않을까?


  콜롬비아에서 이 영화가 잘 먹히는 이유는 여러 가지 있겠지만 그중 큰 지분은 빈부격차에 대한 공감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콜롬비아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빈부격차가 심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어느 블로그에 의하면 콜롬비아는 세계 12위 빈부격차 강국이라고 한다.) 우리 집 옥상에서 남쪽을 보면 저 멀리 산 위에 펼쳐진 고급스러운 마을을 볼 수 있다. 부까라망가 내에서 가장 부촌인 루이토케Ruitoque라고 하는 곳이다.


콜롬비아, 멕시코, 미국, 한국의 지니계수 차이. 콜롬비아는 0.5 근처에 머물고 있다. 실로 놀라운 수치.




  루이토케는 어느 기업의 회장이나 부까라망가의 고위 공무원, 대학 총장 같은 사람들이 산다고 한다. 이야기 듣기로는 루이토케는 입주하는 것부터가 쉽지 않다고 한다. 아무나 돈이 있다고 입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사회적 위치나 평판 등을 조사해서 일정 수준 이상이 된다면, 즉, 루이토케 수준에 맞는 사람만 입주할 수 있다고 한다.


  루이토케는 그들만의 파라다이스이다. 근사한 집들이 펼쳐져 있고 좋은 국제 학교, 대형 병원, 고급 호텔이 있다. 그리고 그들만의 소셜 그룹이 운영되며 철저하게 다른 세상을 배척한다.


  루이토케 주민의 초대장이 없으면 마을에 방문조차 못하며, 초대장이 있어도 신분 검사를 철저하게 하고 신원에 문제가 없는 사람만 방문이 허락된다고 한다. 그래서 심지어 구글 뷰로도 나와있지 않은 곳이다. 나같은 봉사단원 나부랭이는 발조차 디디지 못하는 높은 곳인 것이다.




루이토케와 Acapulco 동네를 구글에 검색해 보았다.


  하지만 불행히도 루이토케에서 바로 내려다 보이는 가까운 곳에는 Acapulco라고 하는 동네가 있다. 이 동네를 구글에 검색해 보면 술값으로 인해 시비가 생겨 살인사건이 생겼다느니 가출 청소년들로 인해서 절도사건이 일어난다는 뉴스만 나온다.


  이 Acapulco는 콜롬비아 내에서 주거지로 가장 낮은 등급인 에스트라토 1인 동네로 부카라망가 내에서 가장 못 사는 동네 중 하나다. 가장 잘 사는 동네 바로 아래 동네가 가장 못 사는 동네인 것이다. 참 극적이다. 빈부격차는 어디서나 있지만, 콜롬비아만큼이나 더 극명하게 잔인하게 나뉘는 곳도 많지 않다.


  영화를 보고 나와 집으로 돌아오는 길. 입이 텁텁했다. 결국 넘어설 수 없는 사차원의 벽을 보고 온듯한 막연함과 허무함 때문이었던 것 같다. 아니면 단순히 도리토스를 많이 먹어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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