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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kim Apr 25. 2020

코로나로 집을 잃다. 콜롬비아에서 한국으로 일시귀국

20년 03월 19일




  "네???"

  3월 16일 월요일 아침. 전날 밤 '콜롬비아 전국 휴교령'이 있었기에 나는 그저 출근 안 할 생각에 기뻤다. 그래서 세상이 어떻게 굴러가는지도 모르고 거하게 늦잠을 잤다. 느지막이 일어나 떡이 되어버린 채로 하루 종일 침대에 철썩 붙어 꾸물거리는 것이 나의 유일한 코로나 방학 계획이었다.(모범적인 사회적 거리두기 아닐까.) 하지만 그 날 아침 컴컴한 방 안에서 실눈 살짝 뜨고 확인한 눈부신 카톡 하나로 이 환상적인 계획은 죄다 틀어졌다.




  "네??" 눈이 번쩍 떠졌다. 믿을 수가 없었다.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코이카 사무소에서는 매일매일 그저 각자 코로나 조심하고 특히 마스크와 손 씻기를 철저히 하라고 귀에 딱지, 아니 눈에 눈곱이 끼도록 공지를 하셨다. 하지만 갑자기 방학 첫날, 월요일 아침 ESTA 미국 비자 번호와 여권 번호를 물어보셨다. 누가 봐도 심상치 않은 이 부탁에 콜롬비아 단원 카톡방은 혼돈의 도가니탕으로 빠졌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코로나 바이러스가 이렇게 심각하지 않았다. 콜롬비아 전역으로 코로나 바이러스가 퍼져나가고는 있었지만 콜롬비아에는 확진자가 채 30명도 안되었었고, 내가 있는 동네 부까라망가에는 아직 확진자도 없었다. 확진자가 몇 천명 있는 한국보다 부까라망가 이불속이 더 안전하다고 그때는 생각했다.


  그래서 1달간 자가격리, 사회적 거리두기라고 쓰고 히키코모리라고 부를 달콤한 방학을 위해 스팀 결제도 해 놓은 상태였다. 하지만 하... 한국으로 일시 귀국이라니... 잠결에 잘못 본 카톡은 아닌지, 꿈인지 생시인지 눈을 비비고 다시 봤지만 모두 실화였다.


  한 순간에 직장도, 집도, 안락했던 나의 방학도 다 잃은 기분이 들었다.


3월 15일까지는 다들 조심하지만 자유로운 분위기였는데...




  그 뒤 하루하루가 정말 다이나믹했다. 월요일에는 누가 봐도 수상한 요구와 함께, 코디님 왈 '한국으로 갈지 안 갈지는 아직 모르고 내부 논의 중'이라고 하셨다. 하지만 그다음 날 바로 일시 귀국이 확정되었다. 그리고 그 그다음 날 수요일. 콜롬비아 수도인 보고타로 돌아가는 티켓까지도 확정되었다. 심지어 보고타로 가는 날은 그그그 다음날인 목요일. 그리고 금요일에는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매일매일 터지는 빅뉴스에 세상에 이럴 수가 있나 싶었다.


  그때부터 하루가 어떻게 흘렀는지 알 수가 없다. 먼저, 장롱에서 사람 하나도 들어갈만한 큰 이민가방을 꺼냈다. 그리고 한국으로 가져가야 할 것들을 보이는 대로 집어서 이민가방에 쑤셔 넣었다. 집주인에게 연락해서 지금의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설명했다. 오후에는 은행에 가서 은행 계좌를 닫았고 내 은행 계좌 속 뭉쳐지지도 않을 먼지도 싹싹 긁어 왔다.


  망할 놈의 이 동네 인터넷은 설치할 때는 마음대로지만 해지할 때는 마음대로가 아니다. 전화 한 통화로도 얼씨구나 쉽게 설치해 주더만 해지하려니 시내에 위치한 본점에서만 할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이 바쁜 와중에 시내까지 가서 본점에 갔더니 창구는 3개, 기다리는 사람은 수십 명이다.


  2000 Hours later. 겨우겨우 내 차례. 인터넷 해지하고 싶다고 이야기하니 에휴. 인터넷이 내 이름이 아니라 집주인 명의였다. 당연히 그래서 해지도 못했다. 이런 멍청한 짓까지 해도 내게 주어진 시간은 딱 하루뿐이었다.




흑흑 내 보물들 떡락.


  집안 한쪽에는 지난 설에 받는 라면, 컵밥 같은 한국 음식들이 쌓여 있었다. 유통기한이 임박해서야 큰 맘먹고 하나씩 까먹었던 한국 음식. 고춧가루, 고추장도 한 숟갈 넣을 거 반 숟갈씩 넣으며 아껴 아껴 먹었는데 이제 내일까지 다 처리해야 하는 골칫거리가 되었다.


  그래서 매끼 한국 인스턴트 음식 파티였다. 컵밥. 죽. 라면. 거기에 고추장을 두 아빠 숟갈씩 듬뿍 퍼서 먹었다. 하지만 그때 그 아껴먹던 맛이 아니었다. 유통기한이 지나기 직전에 먹은 게 아니어서 그랬던 걸까? 곧 한국 가서 지겹게 먹을 것이라 그랬던 걸까? 왜 나는 그렇게나 아껴 먹었을까?




  하루 전에나 알게 된 한국행은 나도 충격이었지만 내 친구들한테도 충격이었다. 정들었던 기계과 선생님들. 과외선생님 세일라. 교장 교감 선생님까지. 이 소식을 전하니 다들 "왜? 아니 어째서? 이 시국에 어딜 가?"냐고 난리난리였다.


  그리고 다들 이 긴급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날 보러 와 주셨다. 세일라는 내가 좋아하는 포니 말타 두 병과 콜롬비아 음식을. 기계과 선생님들은 가는 길에 먹으라며 쿠키랑 젤리를 선물로 주셨다. 그리고 다들 하나같이 '한국 가면 언제 다시 여기로 돌아오냐?'라고 묻는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끝나야 온다고 하니 '알았다'는 말이 힘없게 떨어진다. 그리고 다들 이별이 익숙지 않은 듯. 울상으로 가지 말라고, 안전하게 조심히 다녀오라고 걱정해 주셨다.


하나하나 내 생각해주며 사준 그 마음이 참 고마워.


  하지만 나는 프로 이별러. 내 인생은 대체로 느긋하고 행복했지만 대신 역마살이 내 뱃속 내장지방처럼 군데군데 가득 껴있다. 그래서 매년 철새처럼 돌아다녔고, 감사하게도 혹은 애석하게도 이제 앵간한 이별에는 눈도 깜짝하지 않는다.


  도리어 이런 작별 인사의 끝을 어디쯤 끊어야 할지, 더 구질구질해지지 않는 선에서 딱 서로 고마웠다는 마음을 나누는지 그 애매한 선도 배웠다.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안 슬프게 배웅하는 게 더 슬펐다. 꼭 현실에 찌들어버린 어른이 되어버린 기분이었다.


우리 집이 텅텅 비었구나. 잘 있어라 우리 집.




  부랴부랴 도착한 보고타. 보고타 공기는 코딱지를 잔뜩 만들었고 갑작스러운 보고타행은 미련을 잔뜩 남겼다. 보고타에서 한 일은 하염없이 한국 가는 티켓을 기다리는 일뿐이었다. 하지만 유능하신 코디네이터들은 하늘에 별 따기라는 아니 비행기 따기라는 한국행 티켓을 어디서 뚝딱 구해 주셨다.


  하루 더 자고 다음날 아침에 떠나는 티켓. 옛날 이집트에서 떠나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빵 반죽도 들고 갈 만큼 준비 없이 떠낫다고 하던데 나는 그래도 친구들에게 인사는 하고 떠나니 나는 그래도 낫구나 싶었다.


  보고타 엘도라도 공항. 한국으로 떠나는 비행기를 향하는 하얀 긴 복도. 긴 복도를 또각또각 걸으니 그 길었던 콜롬비아 생활이 다 한여름밤의 꿈처럼 느껴진다. 보고타에서 갓 도착해서 스페인어를 공부한 것도, 컴퓨터실 만든다고 시내를 종일 돌아다닌 일도, 콜롬비아 고등학생을 데리고 기계 수업을 한 것도 사실은 모두 한나절 꿈은 아니었을까? 참 묘한 기분으로 한국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보고타 엘도라도 공항이 횡하다. 이렇게 조용한건 처음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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