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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kim Apr 28. 2020

코이카 일시귀국,
한국으로 돌아오다.

20년 03월 27일





  먼 길이었다. 콜롬비아에서 한국으로 가는 길은 그야말로 어어어엄청 먼 길이었다.


  회사의 이익성을 위해 승객의 인간성을 포기하게 만드는 나르는 콩나물시루 안에서 약 22시간을 보내야 했고, 그 시간 동안 유일한 장점이라곤 먹기 좋게 따뜻하다는 점 밖에 없는 입맛 떨어지게 생긴 끈적한 유기물 덩어리를 무려 4번이나 섭취해야 했다.


  그 시간 사이사이 할 수 있는 거라곤 흐리멍덩한 눈으로 앞 좌석 뒤에 대롱대롱 매달린 4인치 정도 크기의 액정을 보는 일뿐이었다. 그나마도 볼만한 영화가 있었다면 즐거이 봤겠지만 OCN에서도 거절할만한 영화들만 특별히 엄선해서 최저가로 구해왔는지 볼게 너무 없었다. 덕분에 내가 평소에 얼마나 행복한 삶을 살았는지 돌아볼 수 있는 아주 뜻깊은 시간이었다.




보고타 엘도라도 공항이 텅텅 비었다. 여행객들, 택시 호객하는 사람들, 렌트카, 호텔 호객꾼도 없어졌다.


  그 먼 길을 떠나는 날. 그 날 콜롬비아의 수도 보고타는 영화 '나는 전설이다' 속 뉴욕 같은 세기말 분위기였다. 왜냐하면 출국 전 날, 보고타 모든 시민이 특별한 일이 있거나 혹은 산책에 기꺼이 300달러를 낼 수 있는 사람 빼고는 집 밖으로 나갈 수 없는 특별 이동 통제 명령이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도로는 텅텅 비었다. 길거리도 텅텅 비었다. 꼭 죽은 도시 같은 보고타에는 인공호흡기 옆 삑삑거리는 기계처럼 신호등만이 붉게 푸르게 틱틱 바뀌었다. 그래서 평소에는 1시간도 넘게 걸릴 공항 가는 길을 15분 컷 했다.


  보고타 엘도라도 공항에 들어가려면 먼저, 비행기 티켓을 보여주고 통과하고 나선 손에 있는 박테리아가 모두 죽을 때까지 손을 빡빡 씻어야 했다. 그리고 공항 안 거의 모든 사람들이 마스크를 쓰고 있었고 식품공장에 들어갈 때나 쓸법한 우주복 같은 방호복을 쓴 사람들도 있었다.


  공항 안 분위기는 우울했다. 어떤 사람들은 티켓을 못 구했는지 바닥에 주저앉아 울면서 전화하고 있었고, 출국 수속장에 길게 줄 선 승객들은 다들 다급하게 짐 싸고 나온 모양새였다. 유일하게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만 여행 가는 게 신나는지 한껏 들떠 있었다.




  하지만 더 무서운 건 LA 공항이었다. 왜냐하면 전혀 위험성을 인지하지 못한 듯, 평소와 다름 없는 분위기였기 때문이었다. 방역복에 고글에 안전 신발까지 중무장 한 중국인들과 우리 코이카 단원들을 비롯한 소수 동양인들만 마스크를 끼고 있었지 다른 사람들은 코로나 전이랑 똑같았다.


  공항 직원들은 조금 조심하는 분위기였지만 보고타 엘도라도 공항과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미국은 코로나 바이러스가 하나도 무섭지 않나?' 여기는 정말 큰일 나겠다 싶었다. 그리고 며칠 뒤 미국이 중국을 꺾고 코로나 대국이 되었다.


지구 반대편에서 날라왔어요.


  보고타에서 LA로 가는 비행기까지는 그래도 참을 만했다. 하지만 LA에서 인천으로 가는 비행기쯤 되니 나의 인내심은 바닥을 박박 긁었다. 코로나 때문에 어쩔 수 없었지만 하루 종일 끼고 있는 마스크가 너무 힘들었다. 숨쉬기 힘들 뿐 아니라 내 입냄새로 지속적인 생화학 공격을 받으니 차라리 송장이 되어 편하게 누어가는 편이 낫겠다 싶었다.


  게다가 내 자리는 복도도 아니고 창가도 아닌 어중간한 중앙 자리. 안타깝게도 창가 자리에 앉은 승객은 젊은 나이에 요실금이라도 생긴 건지 물만 마셨다 하면 화장실을 들락날락거렸다. 덕분에 정기적으로 비좁은 콩나물시루 속에서 일어났다 앉았다 운동할 수 있었다.




  그렇게 오랜 고통 끝에 한국에 도착했다. 인천 공항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막 비행기에서 내린 사람들로 북적였지만 어느 누구 하나 신나 보이는 사람이 없었다. 코로나 방역 검사를 받기 위해 길게 줄을 서야 했는데 적막이 흘렀다. 다들 핸드폰만 내려다보는 게 장례식장 조문 행열 같기도 했고 저승으로 가는 길 스틱스 강에서 카론의 배를 기다리는 줄 같기도 했다.


한국 도착! 엄숙한 분위기가 감돈다.


  검역에서는 증상도 보고하고 열도 체크해야 했다. 나는 별 증상이 없어서 무사히 나올 수 있었지만 검사가 철저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유 증상자로 분류되어서 코로나 바이러스 검사를 받기 위해 검사실로 이동했다.


  공항에 나온 뒤 바로 집에 갈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코이카에서는 콜롬비아를 비롯한 몇몇 나라에서 온 단원들을 14일 격리하기로 결정했다. 격리되었지만 싫은 마음은 없었다. 오히려 미국 꼬락서니를 보니 내가 감염자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래서 오히려 코이카 지원금으로 14일 격리된다는 것이 고마울 따름이었다.


  내가 격리된 호텔은 세금 아까울 정도로 너무 호화스럽지도 않고 그렇다고 해서 사람이 지내기에 불편하지도 않은 적당한 곳이었다. 아마 이 호텔은 비행기 환승 시간 때 잠시 누울 자리를 찾기 위해 만들어진 호텔인 듯, 별 가구는 없고 큰 침대만 두 개 덩그러니 있는 곳이다.




도시락 잘 먹었지만, 여기서 나가기만 하면 떡볶이, 마라탕 너넨 다 죽었다.


  그렇게 14일간의 격리생활이 시작되었다. 밥으로는 도시락이 나오는데 편의점 도시락이나 한솥, 본죽 도시락, 토마토 도시락 등등 한국에 존재하는 도시락이라는 도시락은 다 섭렵하고 있다.


  하루 3끼 정해진 시간에 문 앞에 도시락을 놓아주시는데 이 도시락을 먹다 보니 내가 이때까지 먹어온 밥들은 1인분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매번 도시락을 까 보면 무슨 푸드코트 어린이 세트만 하게 들어있어서 실망스럽다. 이걸 먹으면 간의 기별이라도 갈까 싶지만 먹으면 놀랍게도 적당히 배부르다. 원래 내 위장은 이 정도 크기였던 것이다. 그래도 도시락이란게 그렇듯 은근 부실하다. 여기서 나가면 마라탕, 떡볶이는 너넨 다 죽었다. 너넨 진짜 끝이다.




  여기서 하고 있는 격리생활에 만족하고 있다. 유튜브에서 노래방을 검색해서 노래 부르면서 시간을 보내고 1047호에겐 미안하지만 운동이랍시고 방 주변을 빙글빙글 돌기도 한다. 방 안 티비로 하루 종일 나 혼자 산다를 틀어 놓고 있어서 벌써 1년 치를 다 보았다. 밥도 은근히 먹을만 하고, 챙겨 온 커피로 카페인도 충전하고 있다.


No cafe, No Life


  느긋느긋 하고 게으른 삶. 이불에 철썩 달라붙어서 꼼짝 안 하는 삶. 밥 걱정 없이 세계에서 제일 게으르게 사는 삶. 어쩌면 모두가 원하는 '건물주'의 삶이 이런 삶이 아닐까? 생각하며 살고 있다. 그러니 다들 걱정 마시라 난 격리 생활을 잘하고 있다.




  오랜만에 돌아온 한국. 지인들에게 연락하려고 카카오톡 친구 리스트를 훑는다. 하지만 이름을 앞에 두고 고민이 든다. '나는 그래도 나름 친하다고 생각하는데.' '나는 이 사람이랑 진짜 친해지고 싶었는데.' '그 사람한테 나는 어떤 사람일까?' '이제 와서 이렇게 연락하는 건 그냥 귀찮게 하는 건 아닐까?' 하는 나의 찐따 같은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와서 나를 괴롭힌다.


  몸이 격리되어있지만 마음이 더 격리되어있는 기분이다. 보고 싶은 사람들이 참 많다. 끝나면 달려가서 쎄쎄쎄 하고 싶다. 부디 이 글을 보는 그대들도 그러한 마음이길 바라며 이불 속에서 꾸물꾸물 거리며 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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