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끝났으면 좋겠어

by 비차

장마철이 되면 방은 수조가 되었다. 끝도 없이 차오르는 물. 밤새 비가 알루미늄 지붕을 때렸다. 박자도 모르고. 새벽을 걸으면 우산을 써도 옷이 젖었다. 횡단보도에서부터 뒤를 쫓는 두 쌍의 발, 흰 자동차의 헤드라이트, 마스크를 쓴 남자, 불쑥 창을 열고 건네주는 것. 우스갯소리.


어두울수록 선명해지는 지옥이 있다. 나는 여기를 벗어나지 못할 거라는 확신이 들어. 왜 이렇게 사는지 누군가 알려 주었지만 납득할 수는 없었다. 이것이 타고난 것이라면 원죄를 가졌음이 분명하다.


조심해야지.
정의는 없으니까.


세상이 끝났으면 좋겠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무너지는 것은 지긋지긋하다. 반짝이는 것은 깨진 단면이다. 조심해, 그건 멀리서 바라봐야지만 아름다운 것. 손을 대면 베이기 마련이니까. 다 보이도록 무너지는 것도 마찬가지야. 차라리 가루가 되어 버리자.


무엇을 주셔도 전부가 아니라면 나는 싫어요. 차라리 잃어버리고 말 거야. 아무것도 주지 말아요. 가지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두려워하는 병을 앓는다. 비가 내리면 든 병이 깊어진다. 나는 지하쳘에서 처음 죽었다. 내가 버리고 버려진 것처럼 내 목숨도 내동댕이 쳐버렸다. 볼품없었다. 하지만 죽음 후에도 삶은 이어진다. 처음으로 내가 죽은 곳을 계속 가야만 하다니, 그렇게 고약한 일이 또 있어? 그래서 지하철을 타지 않기로 했다.


나는 이제 울지도 않는다.


목련 꽃잎이 툭툭 떨어지면 동네 아이들이 그걸 한 장씩 주워다가 손톱 자국을 냈다. 웃으며 손톱자국으로 모양을 만들기도 했다. 하트, 별, 이름, 지그재그 같은 것. 짙은 갈색으로 잎에 멍이 들었다. 목련은 무력했다. 꽉 진 주먹을 풀어보니 내 손바닥에도 손톱 자국이 남아 있었다. 무력하구나.


한때 사랑했던 모든 것들이 이제는 사라지기를 바란다. 나는 모두가 지나친 강 저편에 서 있어야지. 내린 빗물이 어느새 마르는 것처럼 떠내려가야지. 더디게 머뭇거리며 찾아오는 종말. 당신과 썼던 글의 마지막 온점은 나 혼자 찍었다. 죽도록 사랑하고 죽이고 싶도록 미워지는 것. 느린 걸음으로 강둑을 걷다가 비가 그쳤다.


찬란하게 빛나던 꿈, 이런 지겨운 것은 더이상 꾸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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