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스턴트 행복
캔사스에서 지내던 짧은 기간은 나에게 있어 가장 행복했던 시기다. 영어를 못하던 초기에도, 잘하게 된 후기에도 즐거웠던 기억뿐이다. 하루 하루가 즐거웠고, 어제의 나보다 더 나은 오늘의 내가 있었다. 밤에는 내일의 나에 대한 기대로 눈을 감았고,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은 뭘 할까, 어떤 일이 있을까 기대와 함께 침대를 박차고 일어났다. 노란 스쿨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학교도 기다려졌고, 수영도 기다려졌고, 점심 급식 메뉴도 기대가 되었다.
물가가 싸서 은퇴한 노인들이 많이 사는 동네인 캔사스라고 하지만, 나에게는 매일 즐겁고 신나는 곳이었다. 90년대의 미국의 초등학생 교육 문화는 긍정적이고 따스하고 밝고 재미있게 느껴졌다. 핀잔도, 비난도, 평가를 느끼지 못하였다. 몰래 평가를 하고 있을지언정, 학생 당사자는 별로 못 느꼈던 것 같다. 단순한 활동도 즐겁게 놀이로 바꿔주고, 무엇이든 어떻게든 더 즐겁게 하게 해주는 문화. 많은 이벤트가 있고, 참여를 독려하고, 참여자들은 최선을 다하고, 참여자들이 보람을 느낄 수 있도록 노력하는 문화.
그래서 아마 매 순간, 모든 활동에 최선을 다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에너지도 준비 되어있었다. 기쁨과 즐거움, 그리고 새로움에 대한 기대와 확신으로 항상 충전되어 있었다. 부정적인 기분, 의문, 망설임은 없었다.
그런 어느 날, 수영장 훈련 분위기가 어수선 하였다. 평소 수영장에 어른이라고는 데비와 데비 남편 정도인데, 그 날 따라 다른 어른 몇 몇이 수영장에 옷을 입은 채로 서 있었다. 그리고 수영장 옆에 책상이 있었고, 기록 같은 것을 하고 있는 어른도 있었다. 아이들도 웅성 거리며 삼삼오오 모여있었다.
데비는 내게 다가와, 여느 때와는 다른 레인으로 입수하라고 하였다. 이것은 무슨 이벤트일까? 약간의 긴장감과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기대감으로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무엇보다그 레인에는, 나보다 먼저 수영을 시작하였거나 더 실력이 좋은 아이들이 있었다. 무슨 의미일까? 무엇이든간에, 최선을 다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얼마 뒤, 어수선한 분위기 하나둘 정리가 되더니, 입수하라고 한다. 평상시라면 자유영 100미터 4개, 접영 50미터 4개 등, 명확한 지침이 있는데, 이번에는 그런 것이 없이 계속 수영을 하라고 한다. 다른 아이에게 물어도 그냥 계속 돌라고 한다. 이렇게 돌아 본적 이 없기에, 어느 정도 페이스로 돌아야하는지, 나의 페이스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최대한 열심히 수영을 하였다. 평소 나보다 빨랐다고 생각했던 아이들을 추월해서 계속해서 돌았다. 더이상 추월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누군가의 발 끝이 보였다. 그 때부터는 그 발 끝을 보고 따라 랩을 돌았다.
눈 앞에서 번갈아 움직이는 두 발바닥에 집중하였다. 두 발바닥에서 끝나는 킥에서 여유가 느껴진다. 나는 이 발바닥의 주인공을 안다. 그는 나보다 수영을 더 잘 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최선을 다해 이 두 발바닥을 따라가고 있었다. 아마 40바퀴정도 돈 것 같았다.
몸은 이미 평소 훈련량을 훨씬 뛰어넘는 강도에 뜨겁고 부드럽게 타오르고 있았다. 가늘고 길게 뽑아진 집중의 끈은 언제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았지만 계속 이어졌다. 체력은 이미 고갈되었지만, 나는 계속해서 두 발바닥을 쫓았다. 어디까지 따라 갈 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계속 따라가고 싶었다. 스스로가 이렇게 오래, 이 정도 속도로 수영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며 뿌듯하였다. 언제든지 멈춰도 만족할만하고 보람찼지만, 가느다랗고 길게 뽑혀진 집중력으로 태우는 체력이 얼마나 더 버틸 수 있는지 궁금했다. 두 시야에서 발바닥이 사라지지 않도록 호흡과 물 잡기에 집중하며 계속해서 따라갔다.
사실 이상한 일이었다. 누군가가 지침을 준것도, 뚜렷한 목적도 없는데 왜 계속해서 이 페이스를 유지하는 것일까?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알았다. 단 한 순간이라도 페이스를 떨어뜨리면, 이 페이스를 놓친다면, 다시 이 페이스로 돌아올 수 없을 것이라는 것. 그래서 이 페이스를 놓칠 수 없어 계속해서 발바닥을 쫓아 페이스를 유지하였다. 어쩌면 이 이벤트는 그렇게 스스로의 한계를 도전하기 위한 이벤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곁눈질로 수영장 밖을 보았을때, 몇몇 아이들이 수영을 멈추고 수영장 밖으로 나가서 화기애애하게 놀고 있었다. 그 중에는 나보다도 더 빠르고 수영을 잘하는 아이들도 꽤 있었기에, 나는 이러한 추론에 더 확신을 갖었다. 더 강하게 앞 발바닥을 쫓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끝이 났다. 앞의 아이도 멈추었고 나도 멈추었다. 내 앞에서 가던 아이가 의외라는 듯 나를 보았고 나는 고양감과 성취감으로 채워진 몸이 자랑스러웠다. 의기양양하게 수영장 바깥으로 나왔다.
생각보다 별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데비가 환하게 웃으며 종이를 나에게 건내주며 부모님께 전달하라고 했다. 그러면서 굿잡, 격려도 슬며시 밀어 넣었다.
집에 도착한 나는, 가슴을 펴고 엄마에게 전달하였다. 엄마는 종이를 읽어보시더니, 머리를 움켜쥐며 소리쳤다.
"어우."
그리고는 잠시 종이에 무엇인가를 적어보더니 표정이 심각해졌다. 나는 의아했다. 그래서 알려주었다. 이것은 좋은 결과인 것이다, 데비의 표정도 굉장히 좋았다 라고. 엄마는 연신 탄식하며 인상을 찌푸리시고 끄덕였다.
"그래, 그렇겠지."
엄마는 펜을 툭 내려 놓았다. 그리고 설명해주었다.
얼마 전 데비로부터 연락이 왔는데, 랩당 기부하는 이벤트를 한다는 것을 알렸다고 한다. 랩당 얼마의 기부를 하겠는가 물었는데, 엄마는 당시 얼마를 해야하는지 몰라서 적당한 금액을 말했는데, 알고보니 다른 사람들보다 이미 상당히 높은 금액이었다고. 그런데 나는 나의 최선을 다해, 예상을 뛰어넘는 랩 수를 돌았다.
그 말을 듣고 생각하니 아이들이 어느 정도 천천히 한 것도, 빨리 나온 아이들이 있었던 것도 이해가 갔다. 그리고 나 역시, 표가 무엇인지 얼마나 돌아야 하는지 모르는 상태로 임하였기에 계속해서 스스로의 한계에 도전하고 최선을 다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엄마한테 조금은 미안하지만, 덕분에 나는 수영 시작한 지 몇 개월만에 처음으로 자신의 성취를 확인하고 자부심을 갖을 수 있는 기회였다. 어쩌면 그것이 이 이벤트의 진정학 기획 의도였을 수도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