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이유있는 탈의실 혁신

혁신이라기보다는 성공적인 사회적 실험아닐까?

by 상수동해마

파리에 3개월 정도 있었다. 회사 업무 관련으로 가게 되었다. 짧게, 2주 정도 있을 것이라 예상하고 출발했던 터라 미쳐 준비하지 못하였던 부분이 많았다. 사실상 처음이나 다름 없음에도 불구하고 도시에 대해 무엇하나 조사하지 않고 출발하였다. 도시에 대해 백지 상태로 도착하여, 우왕좌왕 1주일 동안 겨우 자리 잡은 후, 수영장을 검색하여 방문하였다.


어렵지 않게 숙소 근처에서 수영장 건물을 찾을 수 있었다. 파리 외곽에 위치한 이 시립 수영장 건물은, 눅눅한 시멘트 색의 회색 건물로 오래되었지만 적당히 관리된 건물이었다. 녹이 슨 난간에 타고 온 자전거를 꼭꼭 묶고, 건물 벽을 따라 계단을 내려가서 건물 안쪽에 들어서자 깨끗하고, 오래되고, 불친절한 인상의 접수처 공간이 나를 맞이한다.


접수처 옆에는 오래된 스텐리스 턴스타일이 있고, 벽에는 수영장 수업 관련 안내 내용이 적힌 포스터가 붙어있었으며, 그 옆의 접수처 유리 뒤편에는 흰 셔츠를 입은 뚱뚱한 남자가 옆의 다른 흰셔츠 남자들과 수다를 떨고 있었다. 내가 영어로 말을 걸며 신용카드를 내밀자 굉장히 귀찮고 짜증난 표정으로 쳐다보며 불어로 퉁명스럽게 말하며 손가락으로 턴스타일 너머를 가리키며 토큰을 주었다. 나는 무해한 아시아인 표정을 짓고, 끄덕이며 토큰을 받았다.



아마도 이 토큰을 넣으면 턴스타일을 통과할 수 있고 거기에 탈의실이 있다는 것이겠지. 이미 수력 30년이다. 일본 미국 한국 이집트 필리핀 수영장 다 가보았다. 척하면 척이다.


3.5유로라니 나쁘지 않네, 한국 공영 수영장과 비슷한 수준의 요금이군, 따위의 생각을 하며 희희낙낙 가벼운 발 걸음으로 턴스타일을 통과해서 벽을 돌아 조금 걷자, 뒤에서 직원이 불어로 소리 지르고 휘파람을 불고 난리를 친다. 뒤돌아보니, 신발을 벗으라는 시늉을 하며 어이없고 짜증난다는 표정을 지어주었다. 저 얼굴은 국제 공용어로, 나에게 목 위의 물건이 장신구인지 묻는 표정이었다.



나는 사과의 의미로 손을 흔들고 신발을 벗고, 양말도 벗어 양손에 들고 찝찝하고 차가우며 젖은 바닥을 가로 질러 걸었다. 바닥은 그다지 깨끗하지도 않았다. 갑자기 뜬금없이 신발 벗는 구역이 나타난 것도 당황스럽지만, 젖은 바닥을 신발 벗고 걸어야 한다니 불편하군 등의 생각을 하며, 찝찝해진 발바닥을 까치발 들고, 탈의실 안을 걷는데 갑자기 눈앞에 여자가 나타났다. 순간 나는 얼어 붙었다.


- 여기는 여자 탈의실인가? 어디서 부터 잘못 들어 온 거지? 어떻게 잘못 들어 올 수 있었지?


나를 못 본 듯, 여자는 그대로 빠른 속도로 샤워 물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 걸어가더니 코너를 돌아 사라졌다.


정적 속에, 나는 잠시 가만히 서서 상황 파악을 해보고자 하였다. 일단 실패. 무슨 상황인지 알 수가 없어, 일단 조용히, 다시 왔던 그대로 뒤로 돌아 서둘러 걸어 나와 벽을 돌자, 나에게 신발을 벗으라고 소리 질렀던 직원이 있었다. 그는 흘낏 나를 쳐다보고는 별 다른 말 없이 계속해서 정리를 하였다.


- 나를 보고도 저 직원이 아무 말이 없다는건 내가 이곳에 있는 것이 문제가 없다는 것이겠지?


많은 의구심과 혼란 속에, 그의 반응으로부터 이곳이 남녀 공용 탈의실일 가능성을 타진했다. 자세히 보니, 탈의실에는 여러 부스가 있었고, 각 부스에는 문이 달려있다. 그리고 여기는 프랑스다. 말이 된다. 모든 것이 말이 되었다. 확신했다. 이곳은 남녀 공용 샤워실/탈의실이다.


남녀가 한 공간에서 옷을 갈아입든 샤워를 하든, 어차피 옷을 갈아입는 순간만 가릴 수 있는 부스가 있으면 상관없지 않은가? 프랑스인들의 합리적인 발상에 감탄하며, 새삼 자신이 파리에 있다는 실감으로 기분이 좋아져 서둘러 부스 안에서 옷을 갈아입은 후 샤워하는 곳으로 갔다.



샤워하는 곳은... 충격적이게도 문이 없었다. 당연히 탈의실의 탈의 부스처럼 부스 같은 것이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그런 것도 없이, 모두 수영복을 입고 그대로 샤워하는 것이었다.


그렇다. 생각해보니 이 또한 말이 된다. 이미 탈의실에서 나온 시점에 수영복을 입고 있으니 샤워실에 대해 남녀 구분할 필요가 없다. 감탄하는 내 눈 앞에, 어린 아들과 함께 샤워하는 여자를 보며 깨달았다. 이곳은 가족 친화적인 수영장 시스템이다. 엄마가 어린 아들과 수영을 하는데 있어, 입장부터 탈의, 샤워, 수영장 입수까지 불편함이 전혀 없는 구조다. 말이 되는 구조다. 스포츠는 가족과 함께할 수 있는 것이 맞지 않는가?


속으로 연신 “말이 돼! 멋지다!” 라고 외치며 들어선 수영장은... 정작 수영장은, 일반 수영장과 별 다를 것 없이 평범하고 친숙하고 반가우리 만치 낮은 천장의 오래된 수영장이었다. 그리운 락스 냄새를 뱉고 있는 오래된 수영장이었다. 마치 옛날 고전 프랑스 영화에서 본 것 같이 낡은 수영장이 푸른색 색감의 벽과 천장아래 있었다. 물론 나는 프랑스 영화를 거의 본 적은 없지만, 이 오래되고 낡고 인간미가 느껴지는 설계는 내가 프랑스 시설에 대해 갖고 있는 선입견에 부합하는 이미지였다.


클래식하면서도 합리적이고 인간미가 도는 설계에, 큰 감명을 가슴에 안고 물 속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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