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년 전 겨울. 누군가 물었다.
“무슨 색이 제일 좋아?”
망설임 없이 보라색이라고 답했다. 따뜻하기도 하고 차갑기도 하고 오묘한 게 알 수가 없어 매력적이라고 했다. 그는 녹색이 좋다고 했다. 그만큼 다양한 색이 없다는 이유다. 요리를 하던 그는 손질하는 재료를 세세히 들여다보고는 아름답다며 나에게 보여주었다. 파인 다이닝이라 불리는, 음식의 미에 완전히 빠져버린 나는 한동안 그림을 그리기 어려웠다. 내가 만들어내는 색깔이 본연 그 자체의 색을 이길 수가 없다는 어떤 핑계가 생겼다.
그 뒤로는 나도 녹색을 좋아했다. 그 때문도 있지만, 하염없이 걸으며 보았던 녹색들이 나를 편안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증명사진의 배경을 올리브 그린으로 한 것은 소란스럽지 않고 차분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의지였다.
색은 그만큼 중요했다. 내가 보는 색들은 그날의 나의 기분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서울에서 출퇴근하며 시야를 채우는 지하철의 회색은 나를 회색 인간으로 만들었다. 어느 날 만난 친구는 내 얼굴이 회색빛이라며 어디 많이 아프냐고 물었다. 아니. 하나도 아프지 않았는데 내가 아픈 건가. 의문이 해결되지 않는 시간들을 보내다 실제로 나중엔 목 디스크 통증으로 일하지 못하게 되었다.
서울에 지쳐 제주에 힐링하러 내려온 진부한 레퍼토리의 주인공이 바로 나. 그렇다면 설렘을 가득 안고 내려온 제주는 어떤가? 벌써 제주에서 생활한 지 8개월이 흘렀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아. 좋네.’
자연에는 엄청난 힘이 있다. 솔직히 제주에서의 생활이 좋기만 한 것은 아니다. 똑같은 일상이기에 노동을 하고 하기 싫은 일들을 이겨내야 한다. 하지만 노동으로 인한 하루의 피로도, 반복된 생활로 인한 무기력함도 산책으로 잊힌다. 2007년 마드리드대학교와 노르웨이생명과학대학교의 합동 연구서에 따르면 자연을 보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나 정신적 피로의 해소가 촉진되며 질병에서 회복되는 속도도 빨라진다고 한다.
일상적으로 보는 제주의 그린은 놀랍도록 다채롭다. 퍼머넌트 그린, 에매랄드 그린, 샙 그린, 딥 그린 등등 그동안 배운 모든 그린들이 한 장면에 펼쳐진다. 경이롭다. 경이로워 속상하다. 왜 이런 아름다운 제주를 더 만끽하지 못하는 걸까. 돌아서면 현실의 욕심과 걱정거리로 머리가 아프다. 결핍을 이겨내어 드디어 어른이 된 것 같다고 믿는 스물일곱의 나는 지금 여전히 무언가 없다. 나는 이것을, 계속 그래 왔듯. 미래의 내가 발견해 정의할 수 있기를 바라며 그냥 둔다. 나의 글쓰기는 이 추상적인 비물질을 찾아가는 예술적 경험, 치유의 여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