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되지 않은

by Erasmus Kim

나는 철저한 "J"다.

여행 일정이 잡히면 매일 들러야 할 카페와 맛집부터 먼저 검색해 지도에 저장한다. 출발 시간과 중간에 들를 만한 휴게소, 도착 시간과 체크인 시간 사이 잠깐 들를 수 있는 카페까지 미리 확인해 둔다. 식사는 매일, 매끼가 겹치지 않으면서도 평소에 자주 먹지 않는 메뉴로 정한다. 무엇보다 여행 시작 2주 전부터는 매일 날씨를 수시로 확인한다. 아무리 확인해도 결국엔 당일이 되어야만 알 수 있는 날씨, 바란다고 이루어지지도 않는 날씨마저, 수백 번 들여다보면 결국 화창한 하늘을 맞이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 건지도 모르겠다.

여러 겹으로 쌓아 올린 계획은, 달성되었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다. 예정된 카페에 방문했다고 치자. 아무리 만족스러웠다 해도 어김없이 다른 대체 카페와 비교를 시작한다. '거기였다면 어땠을까.' 식당의 경우는 더 복잡하다. 만족스러운 식사를 했더라도, ‘그 집이 조금 더 저렴하지 않았을까?’, ‘다른 메뉴를 골랐다면 더 좋은 선택이었을까?’ 같은 생각이 끊임없이 따라붙는다.

인생에서 본 가장 멋진 노을을 나는 또렷이 기억한다. 장모님 칠순을 기념해 처가 식구들과 함께 제주도로 여행을 갔을 때였다. 처가 어른들이나 처형들도 각자 사정과 취향이 달라 평소처럼 내가 계획할 수 있는 건 거의 없었다. 게다가 제주도 날씨는 원래 변덕스럽기도 하거니와, 때마침 마지막 태풍이 북상 중이라 했기에 여행이라는 기대보다는 ‘사위’로서의 역할에만 집중하고 따라나선 여정이었다.

그나마 유일하게 계획했던 흑돼지 맛집에서 관광객들에 치여 정신없이 식사하고 나왔다. 김녕해수욕장을 천천히 걷는데, 하늘은 온통 먹구름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럼 그렇지 뭐.' 하는 마음으로 근처 작은 오름을 한 바퀴 돌았다.

그때, 먹구름 사이로 노을이 비치기 시작했다. 그 빛은 점점 커지더니 머지않아 새빨갛게 세상을 물들였다. 흔히 보던 주황이나 분홍빛이 아니었다. “새빨간” 하늘이었다. 내가 태어나서 처음 본 색이었고, 처음 본 구름이었다. 그리고, 전혀 계획에 없던 순간이었다.
그 노을은 내 어떤 계획보다 완벽했고, 내 어떤 기대보다 벅찼다.

그날 이후로 나는 안다.
인생은 때로,
계획하지 않은 순간이 전부일 수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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