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즈 걸리면 어떡해! 아프리카 해외봉사 가도 될까?

by 차차약사

해외봉사는 대학생 때부터 나의 버킷리스트였다. 내가 아는 손바닥만 한 세상을 벗어나 더 넓은 세상을 알고 싶은 욕구가 늘 있었다. 그 꿈을 처음 알게 되었던 것은 한비야 님의 책과 류시화 님의 책을 읽으면서부터이다. 해군사관학교를 지원했던 것도 배를 타고 전 세계를 한 달 동안 다닌다는 졸업여행을 알고 나서였다. 아쉽게도 합격하지는 못했지만, 대신 대학이란 곳에 와서 나 스스로 두드릴 수 있는 다양한 세계를 만났다.


KOICA에서 하는 대학생 해외봉사 포스터를 볼 때마다 가슴이 설레었었다. 그런데 내가 전공한 과로는 지원할 수 있는 곳이 없어서 아쉬움을 안고 KOICA 홈페이지를 닫았었다. 해외봉사는 진짜 나의 버킷리스트였던 것 같다. 이걸 해보지 않으면 평생 미련이 남을 것 같았다. 그랬기 때문에 28살이 된 내게 또다시 아프리카 해외봉사 포스터가 한눈에 들어온 것 아니었을까. 다행히도 유네스코 한국위원회에서 새롭게 시작했던 아프리카 해외봉사 프로그램은 전공 불문, 나이 불문이었다. 해외봉사 프로그램의 파격적 변화였다. 필요한 것은 현지에서 살아남을 긍정적인 자세 한 가지였다. 누가 봐도 나를 위한 프로그램 같았다.


26살에 회사를 관두고 1년 넘게 여행을 해오면서 이제는 나도 세상에 보탬이 되는 나의 일을 하고 싶던 차였다. 이번에는 먼 길을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대학을 나오고 대학원을 나오고 회사까지 가서야 내가 원하는 일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깨닫지 않았던가. 이제는 진짜 내가 하고 싶은 것에서 나의 업을 세우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28살에 아프리카 짐바브웨에 갔다.


지금이야 아프리카에서 2년을 살고 왔으니 아프리카에 대한 이미지가 선명하게 그려지지만, 가기 전만 해도 어떤 곳인지 전혀 그려지지 않았다. 아프리카라고 하면 막연히 떠오르던 이미지는 TV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해외아동결연 프로그램의 앙상하게 마르고 큰 눈을 가진 아이들의 모습이었다. 뜨거운 태양 아래 척박하게 메마른 길을 걸어가 마실 물을 길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에이즈 때문에 고통받으며 죽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연상되고는 했었다.


하지만 아프리카에 다녀온 후 내 머릿속 아프리카의 이미지는 전혀 다르게 변화했다. 푸르고 높은 나무와 비가 내린 직후 물기를 머금은 풀잎들과 항상 온화했던 사람들의 표정이 생각난다. 닭장 속처럼 빽빽하게 앉은 버스 안에서 옆 사람과 인사를 나누는 게 당연했던 그들의 열려있는 마음들이 생각난다. 열린 마음의 그들에게서 나는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았던가. 지금 떠올려봐도 감사하고 따뜻해지는 순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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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바브웨에 갈 때만 해도 나는 28살에 새롭게 시작한 나의 일이라는 생각으로 사뭇 비장하게 아프리카 사람들을 도와 그들의 변화를 이끌어내겠다는 의지에 차 있었다. 내가 활동한 유네스코 한국위원회의 브릿지 프로그램은 현지 마을에서 살면서 주민들이 스스로 변화의 주체가 될 수 있도록 동기부여를 하는 특징을 갖고 있었다. 기존의 해외봉사 프로그램들이 한국에서부터 무엇을 가르치고 줄지 미리 정하고 현지에 갔던 것과 다르게 현지에서 주민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찾고 주민들이 주체가 되어 사업을 시작할 수 있도록 조력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도너들이 주체가 되면 수동적으로 받기만 하는데 익숙해진 주민들은 프로그램을 이어갈 수 있는 능력을 키우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반짝 인기를 끌었던 프로그램이 몇 년 뒤에 보면 무용지물이 되거나 흉물로 변하게 되는 일들이 비일비재했었다. 이러한 문제점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브릿지 프로그램은 현지 마을에서 주민의 일부가 되어 함께 살면서 주민들 스스로 변화의 주체가 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시작하는 것이 주요 활동 목표로 갖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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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바브웨는 수십 년간 한 명의 독재자가 나라를 이끌고 있었다. 한때는 우리나라보다 잘 살던 적이 있을 정도로 발전했던 나라였으나 부정부패로 인해 날로 경제사정이 나빠졌다. 짐바브웨는 하이퍼인플레이션으로 세계적으로 악명을 떨치며 2009년 자국의 화폐를 포기하게 되었다. 2008년 미화 대비 짐바브웨 화폐의 환율 변화를 보면 자국의 화폐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이 보인다. 짐바브웨에서 일하던 한국 친구는 그 당시에 은행에 줄을 서 있으면 줄 선 순서에 따라 받는 돈이 달라질 정도로 시시각각 환율이 달라졌으며, 잔돈을 받을 때 가방 가득 받아서 도저히 셀 수가 없어 차 트렁크에 넣어버리고 세지도 않았다고 한다. 결국 짐바브웨는 2009년부터 미화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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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스스로 돈을 만들어낼 수 없기 때문에 돈이 굉장히 지저분했다. 스태이플러로 찢어진 돈을 붙여서 쓰기도 하고 빨아서 쓰기도 했다. 지폐는 미화를 쓰고 있었지만 동전은 주변국인 남아공이나 모잠비크와 같은 나라의 것을 사용했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경제사정이 안정화될 수가 없었다. 여러 국가의 화폐가 함께 사용되다 보니 환율이 달라지면 직접적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해당하는 화폐 단위가 없을 때는 몇 백 원 차이를 그냥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버스를 타고 거스름돈을 받을 때 받는 돈이 매번 달라지기도 했고, 미화를 사용하면서는 모든 물품의 기준이 1달러가 되면서 생활비도 비싸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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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어려운 경제사정이 있는 나라에서 나는 2년 동안 타파라 마을이라는 거대한 타운에서 살았다. 수도인 하라레에서 차로 40분 정도를 가야 하는 마을이었다. 거대한 빈민가라고 얘기하지만 정작 나는 그런 것들을 잘 느끼지 못했다. 빈민가라고 하면 굶주리고 헐벗은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 연상되지만 실제로 그곳은 하루하루의 생존을 위해 수공예를 하거나 주변 국가에서 물건을 사 와서 파는 일명 보따리 장수도 많았다. 짐바브웨는 오랜 독재로 정치적으로 경직되어 있던 터라 거대한 국제기구들이 들어와 프로그램을 하기 어려웠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적어도 내 눈에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스스로 살아가는 방법을 찾기 위해 매일 분투하고 있었고 그렇게 만들어지는 에너지가 내게는 역동적이고 희망적으로 느껴졌었다.


자국의 화폐가 길바닥을 굴러다니게 되면서 저축이라는 것이 아무 소용없어지고 불안한 경제사정으로 말미암아 전기는 하루에 한 번 들어오고 수도는 며칠 간격으로 끊어지는 곳이었지만 사람의 생존력은 대단해서 그런 상황에서도 삶을 꾸려가고 있었다. 오히려 전기와 수도가 전혀 없는 시골보다는 그래도 그곳은 발전적인 것들을 도모할 수 있는 여건이 되는 마을이었다. 나라의 전기공급 정책상 한집 걸러 전기가 나가게 되면 이웃집과 전깃줄을 연결해서 전기를 사용했고, 하루 몇 번씩 전기가 나가고 들어오는 상황에서 가전들이 망가지기 일쑤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전기 고치는 데는 모두 박사였다. 아무리 기술 시간에 전기에 대해 배웠어도 실제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나와는 달랐다. 수도가 없어도 깨끗한 우물이 근처에 많이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우물을 길러날르며 빨래도 하고 식사도 했다. 2008년 년 콜레라 때문에 10만 명이 감염되고 4000여 명이 목숨을 잃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우물물로 열심히 청소하고 닦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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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국의 도움 없이는 살기 어려우며 무기력한 사람들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갔던 짐바브웨였다. 내가 도울 일이 많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비장함까지 갖추고 떠났던 곳이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그곳에서 그들의 생존능력에 배웠고 오늘 하루 먹을 것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밝은 마음을 잃지 않는 그들에게서 감사함을 배웠다. 내가 노력해도 바뀌지 않는 나라 사정 탓에 어려움이 불쑥불쑥 나를 덮칠 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아질 미래를 그리며 하루하루 살아가는 그들에게서 좌절감이나 우울감을 찾을 수 없었다. 오히려 나는 한국사람들이 짐바브웨에서 배울 게 많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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