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부터 바로 세워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준 짐바브웨 사람들
아프리카에 갈 때만 해도 내가 짐바브웨 사람들의 엄청난 변화를 이끌어 내고 그들에게 굉장한 도움을 줄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이것이 얼마나 오만한 생각이었는지... 2년을 지내면서 깨달았다. 굶주리고 깡마른 아이들과 질병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라고 생각하고 갔던 곳이다. 나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한 곳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내가 만난 것은 불행하게 일그러진 삶이 아니라 거대한 생명력과 잠재력이었다. 내전지역처럼 당장의 구호활동이 필요한 곳이라면 내가 큰 도움이 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살았던 지역은 우리나라로 치면 70년대와 비슷했다. 풍족한 지금보다도 결핍된 상황에서 사람들은 기회를 찾으려 노력하고 희망을 갖지 않던가. 짐바브웨 사람들은 인프라와 물자가 부족한 상황에서도 작은 희망을 향해 오늘의 노력을 아끼지 않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절망적인 사람들이 가득할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역설적으로 더욱 그렇게 느꼈을 수도 있다. 흔히 우리가 아프리카에 대해 그리는 이미지는 텔레비전 모금 광고에 나오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먹을 것이 없는데 어떻게 살까’
‘마실 물이 없는데 어떻게 살까’
‘에이즈가 많은데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있을까’
이런 근심 어린 걱정으로 그들의 삶을 지구 반대편에서 바라보고는 했었으니까...
막상 그곳에 2년 동안 살아보니 사람들은 우물물을 길어서 물도 마시고 밥도 하고 빨래도 했다. 홈스테이 했던 현지 마을 집주인은 HIV 감염자였지만 마치 만성질환을 가진 일반 사람 같았다. 처음에 집주인 엄마 Sabina가 내게 할 말이 있다고 했을 때가 생각난다. “루도~ 나는 HIV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있어.” 나는 이미 몇 개월을 Sabina와 함께 살았는데... 아마 홈스테이를 시작할 때 이 말을 들었다면 고민의 여지도 없이 그곳에 살지 않겠다고 결정했을 것이다. 에이즈라니... 한국에서는 에이즈 걸린 사람을 본 적도 없을뿐더러 그 사람과 한 공간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두려울 것 같은데... 심지어 한 집에 산다고? 그런데 이미 나는 Sabina와 식사도 같이 하고 티타임도 같이 하며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에이즈가 무서운 병인 것은 사실이다. 완치될 수 없는 병이고 사람 간에 바이러스를 옮길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처의 점막을 통해 전염되므로 식사를 같이 하는 것만으로는 전염이 되지 않고 치료법이 발전되어가면서 이제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불치병이라기보다는 만성질환에 가까워지고 있다.
짐바브웨에서의 2년 간의 삶은 에이즈에 대해 가졌던 내 인식의 변화와 동일하다. 에이즈 걸린 사람을 만나보기 전에는 무섭고 끔찍하고 불쌍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막상 함께 살아보니 단편적인 정보로 삶 전체를 판단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에이즈가 있어도 사람들의 삶은 동일하게 이어지고 때로는 미래가 불확실하고 한순간에 희망이 사라질지라도 오늘을 살아가는 힘은 참으로 역동적이라는 것... 그것을 나는 짐바브웨에서 배웠다. 그리고 다시 한번 깨달았다. 사람들의 삶을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된다. 내가 도와야만 하는 절대적 결핍의 사람은 없다. 오히려 내가 가진 편견을 내려놓기 위해 열린 마음으로 바라보려 매 순간 노력해야 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배워야 한다는 걸 느낀 것이다.
그런 인식의 변화가 2년간 짐바브웨의 삶이 내게 준 인생의 가장 큰 선물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나니 나는 더욱 가벼워진 마음으로 그곳에서 지낼 수 있었다. 내가 도와야 할 사람들이 아니고 내가 배워야 할 사람들이고 나의 친구들이라는 생각... 한편으로는 28살에 불과한 내가 누구를 돕는다는 게 가당치 않다는 것을 뼛속 깊이 깨달은 시간들... 나는 내 삶을 먼저 바로 세워야겠다고 생각했다. 30대 후반이 된 지금은 아프리카에 처음 갔을 때의 나의 나이 28살이 얼마나 어린지 알지만 그때는 몰랐다. 세상을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참 기특했지만 말이다.
짐바브웨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오히려 내 삶을 반추했다. 나 스스로가 똑바로 서 있는지를 돌이켜보니 전혀 그렇지 못했다. 26살에 직장을 그만둔 후로는 돈벌이도 못하고 있고 지구 반대편 사람들을 돕는다고 와 있으면서 정작 나의 가족이나 친구들을 챙기지도 못했다. 열악한 상황에서도 짐바브웨 사람들은 삶의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 애쓰며 살아가는데 나는 나를 스스로 먹이는 경제적 능력도 없는 미숙한 사람이었다. 이제야말로 정말 한국에서 내 삶을 바로 세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지구 반대편 사람들은 이미 나보다 훌륭하게 잘 살고 있으니... 내 가족부터 먼저 챙길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2010년 10월에 짐바브웨로 떠나서 꼬박 2년 뒤인 2012년 10월, 20대에 떠나서 30대가 된 내가 되어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한국에 오자마자 처음에는 아프리카 활동을 마무리하는 행사를 하며 적응의 시간을 가졌다. 함께 사셨던 외할머니가 돌아가셔서 상을 치르기도 했다. 마치 내가 오기만을 기다리셨다가 돌아가신 것처럼 집안의 큰일을 치르면서 나는 우리 가족의 일원으로 다시 돌아가고 있었다.
아프리카에서의 내 심경 변화 중 하나는 대학생 때부터 사귄 남자 친구에 대한 감정이다. 오래 만났지만 워낙 어릴 때 만나기 시작했기 때문에 연애만 했지 결혼을 생각해보지는 못했다. 아니, 내 삶에 결혼이라는 단어가 들어온 적 자체가 없었다. 나는 세상을 돌아다니고 싶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정착이 필요한 시점이었고, 한편으로는 아프리카까지 다녀와서야 철이 들은 나를 언제나 인정해주고 지지해줬던 남자 친구에 대한 고마움이 물밑듯이 밀려왔다. 외할머니 장례를 치르면서 힘이 되어 준 남자 친구... 내가 한국에 없을 때 우리 아빠 환갑에 다녀오며 나의 빈자리를 채워줬던 남자 친구... 그렇게 결혼이라는 단어가 내 삶에 처음 들어왔다. 그래서 우리는 내가 한국에 돌아온 다음 해에 결혼을 하기로 했다.
나는 취업을 준비했다. 처음에는 당연히 2년 간의 아프리카 활동을 경력 삼아 국제개발협력 분야에 취직하려 했다. 하지만 마음과 달리 취업의 낙방이 이어졌다. 서류는 합격인데 그다음이 문제였다. 국제개발협력 분야는 지원자들의 스펙이 화려하다. 외국대학에서 공부했거나 한국에서도 유수의 대학을 졸업하고 해외 활동은 한두 가지 이상씩이며 영어는 기본으로 갖춘 것 같았다. 나는 짐바브웨에서 2년이나 살았고, 다른 해외봉사 프로그램과 달리 현지 마을에서 직접 살면서 아프리카의 삶을 제대로 배웠다고 생각했고 그것이 나의 차별화된 강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국제개발협력 분야에서 필요한 것은 경험에 더한 능력이다. 나는 어떤 능력을 키워왔는지 생각해보니 아마추어에 불과했다. 2년이나 살았으면서 영어는 아직도 생활영어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사실 영어만 정말 잘했더라도 취업이 되었을 텐데... 국제개발협력 분야에서 필수적이라고 할 만한 것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영어면접에서 번번이 버벅거리고 일정 수준을 넘지 못해 불합격하는 나 스스로가 참 한심했다. 마음의 변화와 배우는 마음을 갖춘 것은 스스로 기특하나 누구를 도울 만한 실력을 나는 전혀 갖추지 못했다. 나의 삶을 바로 세우자고 생각해서 취업을 준비하기 시작했지만, 나는 나이 30살이 되도록 시작할 실력도 갖추지 못했다는 자괴감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내가 운이 좋게 취업이 된다 하더라도 그것이 끝이 아니겠구나. 운이 좋아 취업이 되면 더 문제다. 스펙 좋은 사람들 사이에서 부족한 나를 계속 채찍질하고 실력을 계속 쌓아가야 하는 현실이 눈에 그려졌기 때문이다. 내 삶을 잃어가는 조직생활이 싫어서 26살에 퇴사하고 아프리카까지 다녀왔는데 결국 돌고 돌아 도돌이표를 하듯 조직으로 들어가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상황이 싫었다. 내 성격상 분명히 그런 회사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매일을 또다시 고민하면서 어쩔 수 없이 살아갈 내가 그려졌다. 나는 내 삶을 주도적으로 만들어가고 싶은데 결국 정착을 위한 방법이 취업 밖에 없다는 사실이 답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