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발에 대한 로망

by 차차약사

나는 내성적인 아이였다. 공부는 잘했다. 초등학생 때는 공부 잘하는 아이들이 반장, 부반장을 도맡았다. 나는 부반장을 자주 했다. 친구들 앞에 나설 일이 많아졌다. 하지만 일대일 친구관계는 어려웠다. 중학교 때는 신도시로 이사를 갔다. 새롭게 친구들을 사귀었다. 안 그래도 중학생은 사춘기로 예민할 시기다. 나도 그때 질풍노도의 시간을 겪었다. 친구 관계는 늘 서툴렀다. 초등학생 때는 공부라도 잘해서 주목받았지만 중학교에 가니 성적도 별 볼 일이 없었다.


신도시에서는 불과 몇 개월을 살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부모님은 장미 농사를 짓고 계셨다. 우리가 살던 곳과 농장은 차로 1시간 남짓 걸렸다. 농사는 바로 옆에서 섬세하게 작물을 지켜봐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농장 옆으로 이사를 갔다. 나는 졸지에 학교에서 1시간 걸리는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됐다. 집에서 학교까지 다니는 버스는 ‘시영버스’라고 해서 1시간에 한대가 있었다. 아침에는 시간을 맞춰서 버스를 탔다. 버스 종점에서 버스가 출발했기 때문에 시간이 정확했다. 하교할 때가 문제였다. 버스 시간이 정확하지 않았다. 1시간이 1대이기도 하고 버스가 밀리다 보면 시간은 하염없이 늘어졌다. 학교 앞 버스 정류장에서 몇 십분 기다리는 것은 예사였고 1시간, 2시간을 추위 속에서 기다리기도 했다.


신도시의 장점은 내가 사는 마을 안에 학교가 있다는 것이다. ‘초품아’라고 할 정도로 요새는 부모들이 초등학교가 있는 아파트 단지 내로 이사하려고 한다. 그만큼 학교와 집까지의 거리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친구들은 대부분 학교 근처 동네에 살고 있었다. 나만 혼자 학교를 마치고 버스를 기다리고 또 기다리며 집에 가고는 했었다. 어느 날부터는 친구들을 따라 학원을 다녔다. 친구들은 학교 마치고 집에 가서 간식도 먹고 밥도 먹고 옷도 갈아입고 학원 숙제도 한다. 그리고 학원에 간다. 나는 집에 다녀오는 것이 불가능했다. 처음에는 그 시간에 친구 집에 놀러 갔다. 친구 집에서 쉬고 친구 엄마가 주시는 밥도 먹고 그랬다. 그리고 친구와 함께 학원에 갔다. 하지만 언젠가부터는 혼자 학원 빈 강의실에 가 있었다. 빈 강의실에서 숙제도 하고 책상에 엎드려 잠도 잤다. 너무 오래된 일이라 감정도 기억도 흐릿해졌다. 내성적인 아이였지만 내 상황마저 다른 친구들과는 늘 달라서 나는 다른 친구들을 항상 부러워했다. 하지만 그 시간을 견디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어린 시절 내성적이고, 다른 친구들과 늘 달랐던 내 생황 때문에 주눅이 들었었다. 친구들과의 관계도 서툴렀고 특히 일대일 관계는 더욱이나 어려워했다. 친구와 단둘이 있노라치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랬던 내가 지금은 완전히 달라졌다. 지금은 누구와도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정도로 친화력이 좋다. 어느 모임에서나 인싸로 통한다. 쾌활하고 적극적이다. 나도 내가 어떻게 이렇게 변할 수 있었을까 생각해본다. 언제부터 이렇게 밝고 당차고 자신감을 갖게 되었을까. 이렇게 내 글을 써서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고 강의를 하고 싶다는 용기를 갖게 되었을까?


나는 내가 해왔던 도전들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대학생이 되고나서부터 자율적인 선택을 할 기회들이 많아졌다. 전공도 내가 선택했다. 동아리도 내가 선택했다. 방학에는 돈을 모아서 40일간 유럽 배낭여행을 떠났다. 한 달간 인도 배낭여행도 가고, 10일간 태국 배낭여행도 갔다. 친구와 10일간 중국 배낭여행을 가기도 했다. 그때는 그게 특별한 행동인지 몰랐다. 대학생이 되면 다 하는 것인 줄 알았다. 사회에 나와 사람들과 얘기하다 보면 의외로 배낭여행을 오랫동안 다녀온 사람들이 적었다. 그때부터 내가 용기가 많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조금씩 하게 됐다.


26살에 퇴사하고는 자전거 전국일주를 했다. 내가 가보고 싶은 모든 곳에 가봤다. 만나고 싶은 사람도 실컷 만나러 다녔다. 내가 가고자 마음먹은 곳에 새로운 배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내 선택 끝에는 나의 성장이 있었다. 내 주위에는 용기 있는 친구들이 많이 생겨났다. 그런 사람들을 만나러 다닌 결과였다. 내 여자 친구들 중에서 5명이나 머리 삭발을 했다. 아마 더 있을 수도 있다. 그런 친구들을 보니 나도 삭발에 대한 로망이 생겼다. 사람들은 누구나 새로운 것을 시도해보고 싶지만 용기가 나지 않는다. 나 또한 내 주위에 그런 친구들이 없었다면 용기 내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은 친구들을 아는 게 어려울 정도로 내 주위에는 새로운 시도를 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어느 날 기회가 찾아왔다. 아프리카 봉사활동을 떠나기 위해 50일간 국내 합숙훈련을 할 때였다. 남자 동기가 50일간 스스로 머리를 밀려고 바리깡을 들고 왔다. 동기가 밀 때 나도 밀어달라고 부탁했다. 그래서 나는 처음으로 삭발이란 것을 해봤다. 삭발을 해보고 나니, 아 이런 느낌이구나~ 엄청 편하다는 생각보다는 햇볕 때문에 머리가 금방 뜨거워졌다. 평생 삭발을 할 것이 아니라면 다시 기르는 과정도 고역이었다. 그래서 그 한 번의 경험 덕분에 삭발에 대한 로망을 실현했고, 이제는 머리를 예쁘게 다듬는 것에 더 관심을 갖고 있다.


20대 내 삶은 도전과 경험과 배움의 연속이었다. 그 끝에는 언제나 커다란 성장이 있었기에 나는 행복했다. 삭발을 해 본 경험조차 특별했고 스스로가 자랑스러웠다. 지금 애 엄마가 되고 나니 삭발하기가 쉽지 않다. 용기가 절로 사라진다. 보는 눈들이 너무 많아졌고 아이들에게도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렇게 사람들은 점점 용기를 잃어간다. 나이 들수록 뭔가를 시도한다는 게 왜 어렵다는 건지 이해가 된다. 그런데 나는 20대를 그런 경험으로 꽉 채웠다. 그래서 남들이 해보지 못한 경험을 해봤다는 것이 자랑스럽다. 그리고 뭔가 시도하면 그 끝에는 언제나 나에 대한 자랑스러움과 성장의 기쁨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나는 도전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는다. 어떤 도전을 했는지 의미가 있다. 하지만 나는 도전했다는 것 자체가 나를 성장시키고 나를 변화시켰다는 걸 알고 있다. 도전의 진짜 의미는 어쩌면 그것에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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