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합격

조용필-흔적의 의미

by 서란아
이 글이 나올 수 있는 틈을 준 음악
조용필-흔적의 의미


'불합격입니다.'


그는 이 다섯 글자를 처음 마주했을 때를 떠올렸다.

그간의 노력들이 화살이 되어 가슴에 내리 꽂히는 기분이었다.

인생에 더 이상 희망도, 행복도 없을 거란 생각과 왜 남들처럼 합격하지 못하느냐는 말들이 뒤섞여 끈적하고 시커먼 마음의 덩어리를 만들어 내었다.

그것은 그를 위로하고 응원하는 말들을 왜곡시켰고, 매일 밤 그는 괴로워했다.


그는 보고 있던 모니터 화면을 끄고 창가로 향했다.

커튼을 열어젖히자 따사로운 햇살이 얼굴에 스몄다.

창문을 열고 공기 한 모금을 크게 들이마셨다. 상쾌함이 머릿속을 한 바퀴 돌 때까지 깊고 천천히 들숨을 쉬며 곧 일어날 마음의 파장에 긴장했다.

하지만 그의 예상과는 달리, 덤덤하고 차분한 냉기가 마음에 서렸다.

작년보다 더 최악으로 치달을 거라 생각했기에 지금의 느낌을 좀 더 알고 싶어졌다.



때로는 후회도 아름다워
그것은 살아가며 남겨진
흔적의 의미야



모니터가 놓인 책상 옆, 켜켜이 쌓여있는 프린트물과 책들을 뒤로한 채 그는 집을 나섰다.

오랜만에 타보는 전철 안에는 예상보다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앉을자리가 없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는 창이 한눈에 잘 보이는 정중앙에 앉았다. 건물과 나무들이 잔상을 남기며 그의 시선을 붙잡았다.

맞은편 좌석에 앉은 사람들을 보았다. 끝좌석에는 이어폰을 꽂은 채 곤히 잠에 빠진 이들이 앉아있었고, 중간좌석에는 중년의 남녀가 거리를 유지하며 앉아있었다.


딱히 어디를 가기 위해 전철을 탄 것은 아니었다.

항상 어딘가에 혹은 무언가에 가 닿기를 바라며 시간과 계획에 쫓기던 그였지만, 오늘만큼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단지, 지금의 느낌을 구체적으로 알고 싶을 뿐이었다.


태양이 저물고 있었다.

오늘 하루 태양의 성실함과 고단함이 겹겹이 쌓여 청량하던 하늘을 오묘한 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그는 태양의 흔적을 감상하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합격까지 닿지 못했다.

그래, 그뿐이다.

세상이 끝난 것도 아니며, 희망과 행복이 오지 않을 거란 그 어떤 확신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간의 내 노력들은 헛되지 않았다. 단지 합격까지 관통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 사실 하나에만 얽매어 있기엔 내게 남은 인생의 시간이 길다.

어쩌면 내 노력들이 아름다운 흔적으로 남아 앞으로의 인생을 더욱 풍성하게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실패가 곧 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배우고 있는 것이다.'


어느덧 퇴근시간이 되었는지 정차하는 역마다 사람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올라탔다.

자리를 찾지 못한 사람들이 몸 하나 서 있을 공간만 있으면 그 틈새를 파고들었다.

여유롭던 그의 주변은 외투를 벗는 것조차 쉬이 허용되지 않는 간격을 사이에 두고 사람들로 가득 찼다.

답답함을 느낀 그는 다음 역에서 내리기 위해 일어나려고 했다.

그때 옆 사람의 이어폰 바깥으로 흘러나오는 멜로디가 그를 붙들었다.

사람들의 소음 속에 묻혀 가사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창가에서 느낀 햇살의 따스함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는 입가에 미소를 띤 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세상 모든 것은 돌고 돌아가지
마지막이란 없는 것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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