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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울싸람 Sep 05. 2021

세상은 생각보다 더 더럽습디다.

뭘 놀라고 그래? 원래 다 그런 걸.


메디컬 회사 영업팀에서 인턴을 한 적이 있다. 그 부서는 주로 강남 및 신사동 일대 병원을 관리하며 수술용 장비를 판매했다. 인턴의 주 업무는 필요한 서류 작업을 돕는 것 따위였는데, 친해진 선배가 종종 고객 방문에 데리고 다닌 덕에 영업팀이 하는 실제 고객 미팅을 경험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땐 너무 어렸을까. 직무에 대한 경험보다는 먹고살기 어렵다는 깨달음만 얻었다.


의사의 고객으로만 살아온 터라 몰랐는데, 의사를 고객으로 삼으니 그들은 꽤 바쁜 사람들이었다. 쉴 새 없이 이어지는 진료 때문에 보통 2-3시간 이상 기다린 후 잠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마저도 못하고 대기 환자들 틈에서 티브이만 멍하니 보다 돌아간 적이 더 많다.


인상 깊은 고객은 신논현역에 중견기업 버금가는 규모의 병원이었다. 그날따라 선배는 청담동에 들러 샌드위치를 포장하고 서류를 철저히 정리하면서 "이 선생님은 좀 까칠해서 준비가 필요하거든."이라 말했다.


그 선생님은 진짜 까칠했다. 샌드위치에서 냄새가 난다며 눈앞에서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을 시작으로, 본인은 전화 신호음이 오래 들리면 정신적으로 피곤하니 10초 안에 전화를 받으라는 둥 선배를 조곤조곤 괴롭혔다. 얼핏 들으면 말투는 친절하지만 내용은 순 '영업사원인 네가 날 만나는데 이런 것도 안 해와?'의 연속이었다. 베테랑 선배는 무슨 말에도 웃으면서 잘 부탁한다며 넘겼다. 마지막에 만회랍시고 그 의사는 "내가 오늘 좀 예민했지? 이해 좀 해줘, 그래도 우리 병원이 이대리 먹여 살리잖아요."라고 말했다. 양해가 아닌 권력관계에 대한 확인사살에 불과한 한마디.


병원에서 나와 조수석에 앉자마자 말했다.

"대리님, 저희끼리니까 말인데.. 저분 말이에요. 물건 좀 팔아줬다고 사람 무안 주고, 갑질을 즐기는 것 같네요. 배울만큼 배운 사람이."


한쪽 입꼬리가 올라간 선배가 담뱃불을 붙이며 말했다.

"뭘 놀라고 그래? 원래 다 그런 걸 갖고. 그나마 저 양반은 괜찮은 축에 속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인간이 많은데. 한과장님이 그러잖냐. 자기는 우리 회사 직원이 아니라 xx병원 운전기사 같다고. 오죽하면 다른 회사 영업들이랑 친구 먹었겠냐? 의사들끼리 술 먹고 너나 나나 자기네 담당 영업들 으스대듯이 대리처럼 부르니까, 의사들 데려다주고 소주 한잔하면서 친해졌단다."


"... 먹고살기 힘드네요."



저 사람은 얼마짜리야?


그 회사는 2달 후 그만두고, 이후 IT 회사 영업팀에 들어갔다. 업계나 직무에 큰 뜻은 없었다. 많이 뽑는 팀에 높은 합격률을 기대했을 뿐이다. 업계에 상관없이 영업팀의 본질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바로 압도적으로 실적, 숫자, '돈'에 의해 돌아간다는 것.


영업팀은 매주 혹은 매일 숫자를 평가한다. 출근하면 몇 개의 고객사와, 몇 개의 딜을, 얼마나 하고 있는지를 나타내는 대시보드를 보는 게 일상이다. 성과가 나오면 돈과 명예가 모두 따르는 직무지만, 그 반대의 경우 팀 내 존재가치가 작아지며 자존감이 바닥을 칠 수도 있는 직무다.


때문에 한창 성과에 열을 올렸던 시절 생겼던 부작용도 있다. 한정된 시간에 더 큰 숫자를 내기 위해서는 빅딜(big deal)이 필요하다 판단해, 만나는 사람을 돈으로 평가하고 할애하는 시간의 우선순위를 매기는 것이다.


'여기는 천만원도 안 나오겠는걸. 이건 xx씨한테 넘기고 B 회사나 가봐야겠다.'
'고작 오백만원 얘기하려고 이 시간까지 얘기를 하고 있다니. 피곤한 아저씨네.'
'xx 그룹사 친척이면 큰 딜에 도움되겠는데? 부담스럽지 않은 선에 구슬려서 술자리라도 마련해봐야겠다.'


실제로 실적과 인센티브에 취했을 땐 돈으로만 움직이는 부끄러운 생각도 했었다.


미천한 사회경험으로 감히 말하건대, 요즘은 영업이라 했을 때 통상 떠올리는 술 영업이 많지는 않다. 선배들의 라떼는 룸살롱은 일상이고, 뒷돈을 찔러주거나, 차를 사주는 등 적극적인 뇌물공세가 허다했다는데, 적어도 필자가 있던 팀엔 흔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도 아직 몇십억짜리 계약 건이 학연/지연/혈연의 한마디로 왔다 갔다 하는 꼴은 봤다. 한 사람을 밀어내려고 팀장과 작정하고 음해한 내용을 HR에 찌르거나, 대신 죄를 뒤집어쓰고 옷을 벗는 꼴도 봤다. 계약 건에서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이해관계 때문에 제삼자에게 수수료를 떼줘야 하는 구조는 이제 익숙하다. 돈을 중심으로 갑과 을 심지어 병, 정까지 줄을 서는 관계들은 이 세상에 만연하다.



'왜'를 되새기다 - 수단과 목적이 바뀌지 않는 삶


이렇게 픽션에서만 일어날 것 같은 더러운 일들은 모두 돈 때문이었다. 돈은 철저히 삶을 살아가는 수단 중 하나인데 돈을 목적으로 삼는 순간 삶이 망가진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지저분한 일들의 90% 이상은 돈 때문이지 않는가.


돈에 민감한 영업팀에 있으면서, 또 돈 때문에 등에 칼을 맞는 일을 당해도 보니 여러모로 정신건강이 피폐해지고 있는 최근을 보내고 있다.


이때 '내가 뭐 때문에 이러고 있지?'라는 생각은 자조적이면서도 굉장히 도움 되는 한마디다. '왜?'라는 질문을 되새기면 돈이 답이 되지 않는 경우가 대다수이기 때문이다. 돈을 위해 전장에 나선 영업사원으로서도 특정 일에 대한 이유와 목적을 생각하면 선을 지키게 된다. 마찬가지로 자존심 상하는 일을 겪을 때에도 뚜렷한 목적이나 중요한 점을 떠올리면 내면을 다잡을 수 있다.


사회에 발을 내딛기 전 세상은 더러운 곳이라 들었다. 직접 내디디니 이 진흙길은 생각보다 더 더럽다. 하지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 했던가.


이 세상에 대처하기 위해 어릴 때부터 신던 떼 묻은 하얀 운동화를 벗고 흙탕물을 막기 위한 튼튼한 장화를 신었다.


그렇게 완전무장으로 길을 나서면 가끔은 깨끗이 정리된 길을 마주하기도 하고 그 사이에 핀 꽃들도 만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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