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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울싸람 Aug 29. 2021

결혼식, 왜 자꾸 쪼잔함을 시험해?

내가 쪼잔한건가?


‘내 인간관계가 이렇게 좋았다고?'라는 생각이 들만큼, 최근 지인들의 결혼식에 쉴 새 없이 참석하고 있다. 지독한 전염병도 사랑의 결실을 막을 수는 없는 법. 그 결실을 향해 진심 어린 축하를 보냈던 시절도 있었다만, 요즘엔 결혼식이라 하면 현금인출기에 갈 생각이 먼저 든다.


결혼식에 많이 갈수록 다양한 주최자를 보는데, 특히 신랑 신부 측 대응에 따라 식후에 묘한 쪼잔함이 발휘되기도 한다. 얼마 전 다녀온 결혼식도 계속 숨겨둔 내면의 쪼잔함을 자극했다.  




산 넘고 물 건너 도착한 결혼식, 그리고 기대하는 대우


입추를 맞은 주말, 고등학교 절친 중 한 친구가 결혼을 했다. 묻고 따지지도 않고 당연히 참석할 결혼식이 이었지만 썩 기분 좋기만 하진 않았다. 유난히 이 친구의 결혼식엔 뒤에서 말이 많았는데, 초대하는 사람들에게 식사자리 한번 마련하지 않고 복사/붙여넣기를 한 모바일 청첩장을 뿌린다는 이야기가 주였다. 외에도 오래 연락이 없다 대뜸 결혼식 축가를 부탁했다는 둥, 회사 일을 돕고자 하는 식으로 화두를 던지고는 결혼식 초대만 하고 사라져서 간절함을 이용당했다고 느낀 친구도 있더랬다.  


결혼 준비라는 게 워낙 혼을 빼놓는다고 하니 친한 친구라면 더욱 너그러운 이해가 필요하다 생각했다. 그런데 모바일 초청장을 보내며 곗돈으로 축의금 높여서 주기로 하지 않았냐는 말부터 꺼내는 친구에 너그럽지 못했다. 작은 것 하나 마음에 안 들면 다 미워 보인다는 말이 참 맞다. 기차표를 예약하면서 주말을 반납하고 일찍 이동할 생각에 짜증부터 났으니 말이다. 와중에 주변에서도 볼멘소리를 해대니 보일 듯 말듯했던 얄미움이 미움으로 자리잡기 직전이었다. 지방 출신이다 보니 학창 시절 친구들 결혼식에 가는 길은 말 그대로 산 넘고 물 건너다. 평일엔 업무에 시달리다가 소중한 주말을 반납했는데, 이번처럼 서울에 올라오는 길에 허무함만 안기는 결혼식이 종종 있다.


반면 같은 동창인데 덜 친한 친구는 좋은 주최자의 표본이었다. 그와는 자주 보진 않고 가끔 통화를 나누는 사이었는데, 결혼하고 싶은 사람이 생겼다며 예비신부를 소개한 이후론 행복한 모습만 보여줘서 기억에 남는다. 결혼식 전에도 요즘 같은 시대에 실물 청첩장을 서울로 보내는 등, 지극정성을 느껴서인지 기차 타는 발걸음은 가벼웠고 축하를 보내는 박수엔 온 힘을 다했다. 식이 끝나고 돌아갈 때도 멀리서 헐레벌떡 뛰어오더니 이름이 적힌 봉투를 건넸다. 서울에서 오는데 고생했다고 차비라도 하라며 꾸역꾸역 주머니에 넣어줬다. 신혼여행에 다녀와선 면세점에서 맛있는 술을 사 왔다며 내려오면 집에 들러서 먹고 가라는 전화를 받았을 땐, 사람을 대할 때 배울 점이 많은 친구란 생각이 들었다.  


못난 쪼잔함은 이렇게 친구 놈들을 비교하며 나타난다. 방금도 친구 프로필의 해맑은 웨딩 사진을 보고 '이 자식, 이주가 지나도록 연락 한 통 없단 말이야? 결혼 전후로 내가 도와준 게 얼만데..'라고 중얼거렸다. 그러다가도 '아니다. 좀 정리되면 연락 주겠지.' 하며 넘기다, 또 불쑥 '이 자식 옛날부터 주변머리 없었지 이거.'라는 쪼잔함이 반복하고 있다.



축하행사인가 기브 앤 테이크인가

 

결혼식이라는 행사에서 주최자의 대응이 쪼잔함에 큰 영향을 끼치는 데에는 우리나라 결혼식의 특징이 한몫한다. 30분 남짓하는 식을 치르기 위해 드는 비용과 시간은 굉장하지만, 정작 홀이 어땠는지, 꽃이 생화였는지, 드레스가 예뻤는지는 순 그들만의 리그다. (하객 입장에선 주차가 잘되고 밥이 맛있으면 가장 기억에 남을 뿐이거늘..)


그만큼 다 똑같은 외관의 결혼식에 비슷한 내용의 콘텐츠이다 보니 감흥이 적다. 모 연예인을 필두로 스몰웨딩이나 개성 있는 결혼식이 늘었으나, 준비하는 사람 입장에서 여간 까다롭기에 통상적인 결혼식을 택한다. 행사라는 건 사용자 경험을 수반하는데, 이렇게 일원화된 행사에서 사용자 경험 만족도는 낮고, 주최자의 대응이 변수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쪼잔함의 발휘에는 진정성의 문제도 있다. 참석자의 본 목적인 '축하'의 마음이 적고, 미래의 본인 혹은 자녀의 결혼식 하객 수라는 '테이크'를 위해 '기브'를 하러 가는 경우가 많다. 하객이라는 게 알바까지 쓸 만큼 중요하다고 하니 하객 수를 높이는 데 직방인 기브(참석)가 필요하다. 암묵적으로 '나도 당신의 결혼식에 갔으니 당신도 올 것이다.'라는 약속과 여기엔 돈이 든다.


그러나 빠른 시일 내에, 혹은 먼 미래에도 결혼식이 없을 계획이라면? 테이크는 못하고 기브만 해야하니, 특히 '축하'의 마음이 적다면 다른 목적도 없어 괜스레 억울해지는 것이다.




쪼잔함의 극복과 진실된 축복

 

글을 쓰면서 과감히 본인의 쪼잔함을 인정하게 됐다. 대신 여기에 친구 험담을 했으니, 이를 쪼잔함과의 마지막 작별인사로 삼고 너그러운 사람이 되겠다는 다짐도 했다.


친구 없이 못 살 것 같은 시기가 있었다. 혼자가 되기 위한 성장과정에서 가족보다도 친구가 나를 더 잘 알던 시절 말이다. 시간이 흘러 혼자 사회에 발을 담고 살아남아야 하는 시절이 됐으며, 자신의 가정을 꾸리며 새로운 조직에 어깨가 무거워지는 시기가 됐다.


하지만 적어도 함께했던 친구라면 그 혹은 그녀가 아직도 실수가 많은 그 꼬마라는 걸 알기에, 실수가 있어도 이해하고 웃어넘길 수 있을 것이다. 예전만큼 시간을 나눌 수 없다는 건, 그만큼 그 꼬마가 새로운 조직에서 본인의 막중한 임무를 잘 수행하고 있음으로 축복할 것.


뒷담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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