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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니어 Aug 18. 2019

운세와 시간을 갖기로 했다

운명과의 눈치싸움 그만두기


'우리 각자 시간을 좀 갖자'



라는 클리셰 같은 문장을 실제로 들어본 적은 없어도 마음속으로 외치는 경우는 종종 있다. 나는 솔직하고 정이 많은 인간이라 감히 타인을 향해 저런 말을 내뱉지는 않지만, 비인격적인 개체에 대해서는 가끔 속으로 "이제 정말 너 하는 꼴에 지쳤어! 우리 이제 각자 시간을 좀 갖자!" 하고 우수에 젖은 표정을 짓기도 한다. 그러니까, 얼마 전 퇴사를 하고 나서 각자의 시간을 갖기로 선언한 것이 몇 가지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운세'다.

사주, 타로, 별자리, 점성술, 명리학 등  다채로운 방식으로 내게 일어난 일들을 해석하고 예측하려던 내가 운세 앱을 모조리 지운 까닭은 스스로에게도 명확하지 않다. 유사 과학에서 말하는 것들이  끼워 맞추기 식이라는 것을 깨달아서인지 아니면 단순히 흥미가 떨어져서인지, 그것도 아니면 좋은 말들로 포장된  미래 예언의 적중률이 처참해서인지, 친한 친구가 비웃어서 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이 모든 것들의 환상적인 콤비네이션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뭐 딱히 몰라도 괜찮지 않은가.


결론의 이유는 몰라도 이런 거리 두기가 가능해진 까닭은 비교적 명료하다. 내 인생에서 마주한 '실패'의 원인과 책임이 어느 정도 내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드디어 인정할 준비가 된 것이다.


수많은 낙방과 거절, 그 와중에 번번이 잡아낸 기회들은 초라하거나 비참한 것들뿐이었다. 오만한 나는 내게 벌어진 일들이 단순히 '불운'의 결과라고 나 자신을 위로하고 설득했다. 물론, 어떤 일들은 분명 불운에서 기인한다. 계획과 다른 일들이 벌어지고,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 결과를 받아 드는 것이 오로지 내 부족함과 문제에서만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보다 - 어쩌면 오만하게도 이 세상에서 가장 잘 - 알고 있다. 선택과 결과 사이에는 일개 인간인 납득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하고 많은 요소가 작용한다. 타인의 의지 혹은 실수, 시스템의 의지와 오작동, 역사적 사건들, 생물학적 욕망과 예측 불허의 천재지변 등...

나는 원체 의심이 많은 인간이어서 일곱 살 때부터도 복잡다단한 인과에 대해서 매우 미심쩍게 여기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유사 과학에 흥미를 느끼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어차피 명료하게 이해되지 않는 게 인생사라면 차라리 쌀알을 흩뿌려 나오는 우연한 모양으로 파악하는 게 더 낫지 않나? 카오스와 카오스가 카오스와 코스모스보다는 더 비슷하지 않나? 라는 논리로 말이다. 마치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연속되고 이어지는 유일한 단서는 사랑뿐이라고 말하는 인터스텔라의 브랜든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 '불운'이라는 아늑하고 포근한 변명의 늪 속에 침수되기 일보 직전임을 직시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은 6개월 동안은 짧은 회사생활 때문이었다.


퇴사 스토리를 장황하게 설명하고 싶지만, 그러기엔 나의 회사생활은 '비교적' 순탄했다. 1년에서 6년 차까지 다양한 커리어를 가진 지인들의 이야기와 비교하자면, 내가 다녔던 회사는 굉장히 마일드한 환경이었다. 살인적인 야근, 사이코패스 상사, 노예 계약 등.. 회사원이 맞닥뜨리게 되는 몹은 굉장히 다양하다. 그중 사회생활 Lv. 1 이었던 나의 첫 몹의 테마는 '정치와 눈치 게임' 이었다. 그나마 가장 마일드해 보이는 그 테마가 안타깝게도 정직과 성실에만 스탯을 몰방해 둔 나에게는 최악의 선택지였다. 나는 '요령껏' 농땡이 피우는 데 너무나 젬병이었고, 고작 3개월 만에 히스테리가 극에 달했다.



익숙한 자리에서 편안한 생활을 오랫동안 하다 보면 개인의 기질이나 의지와는 상관없이 시스템이 인성을 잡아 삼키곤 한다. 그런 곳이었다. 너무나 아늑하고 편안해서 누구도 미래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고, 가끔 그늘이 드리워도 막연한 관성으로 무시하는 그런 곳. 마치 시간이 멈춘 듯 움직이지 않고 때때로 명품 시계와 가방, 그리고 성 고정 관념적 주제만이 휴식 시간 잡담을 채웠다. 그게 아니면 누가 실세니, 누구는 장기자랑에서 병신 같은 춤을 췄다니, 사진을 보여달라니 하는 가쉽을 껌처럼 질겅질겅 씹어댔다.


6개월 동안 보고도 못 본척 들어도 못 들은 척 묻는 말에는 천치처럼 허허 웃었다. 산송장처럼 자리를 채우다 조용히 정규직 제안을 거절했을 때 팀장은 외계인을 보듯 나를 쳐다봤다. 아니 왜? 라는 얼굴로. 그동안 수백 수천 번 내가 지었던 '아니 왜?'라는 표정은 단 한 번도 눈여겨본 적 없는 게 분명했다. 같은 언어를 쓰고 있는 데도 단 한 마디로 서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더 아무 말도 덧붙이지 않았다.



회사 밖으로 다시 나왔을 때, 내가 왜 그곳에 갔어야 했는지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명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곳은 '반드시' 거쳐야 하는 환승지였다는 사실이 선명해졌다. 그러나 왜 그랬을까. 인간은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은 아무리 바래도 얻을 수 없다. 노력과 상관없는 영역이 바로 그것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자기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다면 결국에는 얻지 못하게 된다. 역으로 생각하자면, 내가 얻게 된 것 - 내게 지금 주어진 것이 바로 "나에게 어울리는 것"이라는 말이 된다. 그 6개월의 시간 동안 내가 다녔던 회사는 나에게 가장 "어울리는 곳" 이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나는 그 자리에 가지도 못했을 것이다. 아니면 그곳이 내 근처에 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 사실이 치 떨리게 싫었다. 그 이유를 명명백백히 밝혀서 더는 그곳이 나에게 '미치지 못하도록' 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모든 것은 나의 어떤 행동의 귀결이었음을 되짚어 보아야만 했다.

그리고 결론은 생각보다 더 간단하고 명료했다. 내가 바로 "익숙한 자리에서 편안한 생활을 오랫동안 하다 보니 기질과 의지와는 상관없이 시스템에 인성을 잡아 먹힌" 그런 인간이었던 것이다.


나는 모든 실패와 성공을 운에 내맡겼다. 일정 부분이 아니라 내 삶의 책임을 모두 전가해 버리고 싶었다. 나쁜 일이 생기더라도 그건 시스템의 잘못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냥 '저절로' 알아서 잘 되기만을 바랐다. 무엇 하나 책임지고 싶지 않았다. 실패의 원인을 나 자신에게 묻기가 두려웠다. 그 모든 것을 '외부적인 것'으로 탓하고, 그 흐름에 맡기고 싶을 뿐이었다. 내가 해야 하는 일을 명확히 알고 있었음에도, 나는 운명과 적당 것 눈치 게임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운세를 끊었다.


신의 의중이나 운명의 흐름에 '적당 것' 줄타기를 하려는 얄팍함을 스스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그 눈치 게임에 환멸이 난다. 되든 안되는 상관 없다. 이미 정직과 성실에 스탯을 다 몰빵해서 눈치에 찍을 능력치도 없다.


어쩌겠나, 이미 이렇게 된 거.


역시 우물은 한 우물만 파야 하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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