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킹, <유혹하는 글쓰기>에 대하여
일요일 밤. 단골 카페로 불러낸 선배에게 고민을 말했다. 나의 오랜 꿈이었던 소설을 쓰고 있는데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고. 맘 가는 대로 썼다가 나도 만족하지 못하고, 보는 사람의 고개도 갸웃하게 만드는 결과물이 나올까 봐 두렵다고. 맞다. 나는 슈퍼 울트라 쫄보다.
그 선배가 책 한 권을 추천했다. 스릴러 심리 소설의 대가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였다.
"그 사람은 글이 안 써지면 작업실 문을 닫고 눈을 감고 인물의 행동을 지켜본다더라. 머릿속으로 상상한 걸 그대로 받아 적는대. 아니면 생각난 문장을 일단 적고, 거기서부터 이야기를 쭉 써 내려간대. 소설의 시작은 이래야 하고, 저래야 하고, 배경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고 이런 복잡한 건 제쳐둔다고."
답안지처럼 느껴졌다. 그래. 플롯을 짜고 완벽한 기승전결을 만들겠다고 안 되는 걸 잡고 있지 말고, 스티븐 킹처럼 해보자.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자. 오케이. 이제 나도 스티븐 킹 되는 건가? 할리우드 가는 건가?
집에 오자마자 리디북스로 책을 샀다. 기억에 담을 문장들만 형광펜을 칠하려고 했는데, 디지털북 전체가 노란빛이 되어서 의미가 없어져버렸다.
제목만 들었을 땐 스토리 작문서일 거라고 생각했다. 펼쳐보니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스티븐 킹의 자전 소설이라고 해도 무방할 만큼 다양한 장르를 포함했다. 자신의 최초의 기억부터 학창 시절 어떤 아이였는지, 얼마나 많은 소설을 출판사에 제출하고 거절당했는지, 망한 줄 알고 구겨 버렸던 소설이 33개 언어로 번역되고 1976년과 2013년 4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두 번이나 영화화된 이야기까지, 마치 자신이 대작 소설가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던 평범한 남자의 성공기를 읽는 느낌이 들었다. 흥미로웠다. 그 가운데 뜻하지 않게 내게 위로가 된 한 부분을 이야기해보려 한다.
지난겨울 마음이 힘들었다. 마음이 어렵고 어지럽고 복잡하고, 정리가 안 되고 아무튼 그랬다. 병원에 가서 강박증 처방을 받고 약도 먹었다. (별 일 아니다. 누구나 하나 이상의 병명을 갖고 있다. 여러분은 아닌가.)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카를 융 전문가가 쓴 심리학 책을 집었는데 서문을 읽다 그대로 접었다.
'나는 나의 직감을 꽤 믿는다. 그 직감은 대개 틀린 적 없다.' 이 말이 주는 폭력성 때문에.
단 두 문장이었지만 정신적 강박증이 도진 상태였던 내게는 '나의 직감을 꽤 믿는다. 그 직감은 대개 틀린 적 없다. 지금 내가 느끼는 아슬아슬한 감정, 곧 폭발할 것 같은 불안감, 누군가 나를 미워하고 있다는 기분, 그 직감은 상상이 아니라 진실이다. 왜냐하면 내 직감은 대개 틀린 적이 없기 때문이다'라는 다음 문장이 술술 그려졌다. 카를 융 전문가에게 영향받기 전 도서관에 고이 반납해드렸다. 지금 생각해도 잘한 일이다.
몇 달이 지나 <유혹하는 글쓰기>를 읽다가 나는 이 일을 다시 떠올리게 됐다.
작가로 성공하기 전, 스티븐 킹은 줄 간격 없이 세 쪽 분량의 초고를 쓰다가 실망하여 구깃구깃 뭉쳐 내던졌다. 당시 그는 이 소설에 네 가지 문제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문제점들을 상세하게 분석해보았다. 그 근거들이 무척 객관적이고 논리적이라, '이 소설은 쓰레기가 될 것 같다'는 그의 직감은 한 치의 오류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 소설을 통해 훗날 스티븐 킹이 최고의 작가로 발돋움하게 되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음에도, 나는 자석에 이끌리듯 그의 직감에 동조하고 있었다. 젊은 교사였던 그는 마음에도 안 들고 잡지사에서 사주지도 않을 중편 소설을 쓰느라 1개월을 허비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굳게 믿으며, 쓰고 있던 원고를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그런데 이튿날 밤 학교에서 돌아오니 그의 아내가 그 초고를 갖고 있었다. 아내는 담뱃재가 묻은 초고를 털며 이렇게 말했다. "이 소설엔 뭔가 있어요. 내 생각은 그래요."
그래서 스티븐 킹은 그 이야기를 계속 썼고, 1974년 첫 장편소설 <캐리>를 발표했다. <캐리>는 스티븐 킹의 명성이 시작된 첫 출판물이다. 그리고 앞서 설명했던 것처럼 두 번이나 영화로 제작된 소설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독자가 그렇듯이 작가도 처음에는 등장인물에 대하여 그릇된 인식을 가질 수 있다는 깨달음이었다. 이에 버금가는 깨달음은, 정서적으로 또는 상상력의 측면에서 까다롭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작품을 중단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점이다. 때로는 쓰기 싫어도 계속 써야 한다. 그리고 때로는 형편없는 작품을 썼다고 생각했는데 결과는 좋은 작품이 되기도 한다.
내가 왜 이 부분에서 뜬금없이 위로를 얻었느냐면, 조언을 전하는 그의 태도 때문이다.
스티븐 킹이 조언을 전달하는 방식은 적절하다. 계도하지 않고 단정하지 않는다.
그저 경험담을 풀면서 자신을 의심하지 말되 직관에 대해서도 경계하라고 말한다.
다른 사람이 나의 소설을 똥이라고 생각하면 어쩌지, 이게 똥이 될 것만 같은 나의 직감이 들어맞으면 어쩌지 하는 99%의 불필요한 걱정에 휩싸여있던 나는 또다시, 답안지를 얻은 느낌이었다.
나의 직감은 맞을 수도 틀릴 수도 있다. 인생처럼.
때로는 타인의 피드백에 귀 기울이기도 하고, 때로는 고집도 부려야 한다. 스티븐 킹처럼.
그러니 뭐든 시도해보아야 한다. 적어도 후회하지 않으려면.
여러분이 죽어라고 열심히 노력하기가 귀찮다면 좋은 글을 쓰고 싶다고 말할 자격이 없다. 뮤즈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가 여러분의 집필실에 너울너울 날아들어 여러분의 타자기나 컴퓨터에 창작을 도와주는 마법의 가루를 뿌려주는 일은 절대로 없다. 뮤즈는 땅에서 지낸다. 그는 지하실에서 살고 있다. 그러므로 오히려 여러분이 뮤즈가 있는 곳으로 내려가야 한다. 그리고 내려간 김에 그의 거처를 잘 마련해줘야 한다. 다시 말해서 낑낑거리는 힘겨운 노동은 모두 여러분의 몫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스티븐 킹의 조언을 따라 여러 가지 방식으로 소설을 구상했고, 두 개는 이미 퇴짜를 맞았다. 그러나 흔들리는 스토리들 속에서 직감과 고집과 자기 확신의 조화로운 향을 맡으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더디지만 조금씩 나아가면서, 킹의 말마따나 '나의 글쓰기를 수월하게 도와줄 뮤즈가 조만간 나타나 시가를 질겅질겅 씹으면서 마술을 펼치기 시작할 때까지' 쓰고 또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