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자신으로 살아가지 않은 삶은 금방 지친다
한때 누구보다 늦게까지 남아 야근하는 것, 높게 찍힌 근무시간에 피곤에 절어있는 얼굴이 성실의 상징이던 때가 있었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이유는 모르지만 ‘성실’은 좋은 것이며 ‘성공’으로 가는 열쇠라고 교육받아왔다. 나의 실수는 이것이었다. 왜 성실이 좋은 것이냐고 묻지 않았던 것. 아홉 살의 나는 그 질문을 하지 못한 대가로 20년을 성실한 척 살아가야 했다. 그냥 그것이 옳은 것이기 때문에.
나는 누구보다 게으른 사람이다. 냉정하게 자기 평가를 해보자면 정말 게으르고 욕심은 조금 많고, 욕심에 비해서는 능력이 약하지만 평균보다는 머리가 좋은 편이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영화만 볼 수 있는 사람. 카톡도 내가 길게 답장해야 하는 것이면 며칠이고 읽지 않는 사람. 정리는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해서 한 번에 몰아서 하는 사람. 이런 게으른 모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성실이라는 단어를 알게 된 순간부터 평생을 성실한 척 살아왔으니, 어떻게 지치지 않을 수 있을까.
성실한 척 살아온 나날들이 나에게 가져다준 것들도 많다. 학창 시절에는 공부가 성실의 지표구나 라고 생각해서 공부하는 척을 했다. 보통보다 머리는 좋기 때문에 공부하는 척만 해도 성적이 잘 나왔다. 그래도 능동적으로 공부하는 친구들은 절대 못 쫓아가는 법. 중학교 때는 전교 순위권에서 놀았지만 고등학교 때는 역시 바닥이 금방 드러났다. 어쨌든 공부하는 척을 통해서 어찌어찌 대학을 나온 것을 보면 성실한 척이 기본 교양은 챙겨준 것 같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회사가 성실의 지표구나 라고 생각해서 원하는 회사를 들어가기 위해 몇 백통의 자기소개서를 쓰고 수십 번의 면접을 봤다. 그 과정에서 나는 특히 최종면접에서 많이 떨어졌는데, 나는 그것이 회사와 직군에 대한 진실성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것 또한 나는 어떤 직군에든 어울리고, 희생할 준비가 되어있다고 나를 포장했기 때문이니까. 하지만 타석에 많이 서게 되면 확률은 자연히 높아지는 법. 성실한 척을 했던 것이 한 번 더 나를 밥벌이하고 먹고살게 해 주었다.
이렇게나 치열하게 성실한척하고 살아왔지만 내가 간과한 것이 있었다. 나 자신이 아닌 성실한 다른 사람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진짜 내가 누군지 모른다는 것. 번아웃은 평일이 아니라 휴일에서부터 찾아온다. 내가 드디어 20대에 정착할만한 회사를 들어가게 되었을 때의 일이다. 이제 더 이상 새벽까지 자소서를 쓰지 않아도 되겠구나! 기쁜 마음에 한두 달은 주말이 평화로웠다. 입사 세 달째. 주말에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두 달 동안 친구들도 다 만났고. 가족들과도 할 이벤트는 모두 끝난 상태. 회사원인 나는 평일에만 성실한 척하면 되고, 주말에는 성실한 척의 탈을 벗게 되는 상황이다. 주말에 공부를 못해 안달 난 학생은 있어도 주말에도 일을 못해 안달 난 회사원은 없으니까(개인적으로 일 욕심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면). 나는 일을 제외하고는 어떤 사람이지? 혼돈이 찾아왔다. 20대의 끝에 마주한 나의 민낯은 처참했다. 아홉 살 먹은 아이처럼 무엇을 할지 정하지도 못하는 꼴이 비참하기 그지없었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취미생활은 있는 건지, 친구 만나는 것 말고는 주말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 내가 가지고 있는 나라는 사람에 대한 정보는 아무것도 없었다.
주말이 비참해지기 시작하면 평일은 더욱 비참해진다. 주말을 이미 자신에 대한 의구심을 보낸 상태이기 때문에, 주중의 나에 대해 이미 정나미가 떨어진 상태. 일을 하면서도 내가 이것을 하려고 나의 정체성 전부를 잃어버린 건지 회의감이 든다. 일에 대한 열정도 싸늘하게 식어가는 단계이다. 회사처럼 성실한 모습을 보여야 하는 곳도 없는데, 이미 나는 내가 20년 동안 성실하게 살아온 대가로 눈앞에 펼쳐져있는 얼마 안 되는 월급, 신입에게 바라는 것이 많은 팀장, 나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를 안 해주는 동료들의 모습으로 머리가 어지럽다. 게다가 TV에서 나오는 아파트 값 연일 최고가 갱신 뉴스는 앞으로 성실한척하며 살아가도 지금과 같은 삶이 더 나아지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준다. 이제 나는 앞으로도 이렇게 살아가야 하는 것 밖에 방법이 없구나 라는 생각이 들고 번아웃은 최고점을 찍어버린다. 이 생각은 마치 독가스처럼 온몸에 퍼져서 모든 열정을 죽여버린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내가 아홉 살 때 왜 나는 성실하게 살아야 했는가 라는 질문을 했다면, 맹목적으로 성실을 믿고 살지 않았더라면 이라는 가정을 해본다. 성실은 어떤 것도 가져다주지 않는다. 성실은 어떤 대상을 대할 때의 좋은 태도 중 하나일 뿐이다. 나는 성실이라는 것이 목적이 돼버린 삶을 살았다. 실제로는 내가 어떤 대상에 성실해야 했는가. 나 자신이었다. 자신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했다면 20년 동안 나는 하고 싶은 것을 찾아주었을 것이고, 많은 것을 경험시켜주었을 것이고, 성실한 척을 하는데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을 것이다. 삶을 채우는 것들은 모두 진실된 것들이다. 진실된 사랑, 지성, 신념, 사소한 행동들까지. 삶은 진실이 아니면 채워지지 않는다. 성실한 척이 가져다준 모든 것들은 나의 일부가 아닌 것임을 스물아홉이 된 지금에서야 알게 되었다.
20대의 번아웃은 사소한 것이 아니다. 이미 나도 이로 인한 심각한 고통을 겪었으며 아직도 나는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상태다. 다만 잃어버린 20년 동안 몰랐던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찾기 위해 하루하루를 살아나간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나의 삶도 허울이 아닌 진실로 채울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만이 번아웃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라 믿는다. 누군가 한 말이 생각이 난다. 지쳤다는 것은 노력했다는 증거라고. 허울뿐이었던 나의 삶도 잘 살아보기 위해 노력했던 증거라고 여기면서 이 말을 되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