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캡슐

by 김한슬



어릴 적 나는 유난히 어떤 것들을 오래 붙잡아두고 싶어 했다. 그래서 한동안 책상 위를 굴러다니던 작은 틴케이스를 집어 들었다. 반짝반짝 스티커 자국이 얼룩처럼 남아 있는 은색 통 하나. 두 손을 포개면 쏙 들어오는 은색 통을 깨끗하게 닦고 햇빛 아래 말린 후 그 안에 미래의 나에게 전하고 싶은 것들을 조심스레 넣었다. 정확히 무엇이었는지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흐려졌지만 꽤 중요하게 여겼던 것만은 또렷하게 기억이 난다.

동생과 함께 학교 운동장 한편에 장난치듯 흙을 파고 그 타임캡슐을 묻던 날 찾아오게 될 미래에 비밀스러운 약속을 남기는 기분이었다. 미래의 내가 얼마나 멋진 어른이 되어 있을지 상상하며 잔뜩 기대를 품고 조심스레 흙을 덮었다.

어느 날 문득 그 생각이 났다. 그리고 애매한 충동이었지만 지금이 아니라면 영영 잊을 것 같다는 생각에 학교 운동장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하지만 운동장 풍경은 이미 다른 모습을 띄고 있었다. 모래가 가득 차 있었던 흙바닥엔 인조잔디가 깔렸고 타임캡슐을 숨겨둔 자리는 커다란 운동 기구와 가로등이 차지하고 있었다. 발로 바닥을 꾹꾹 눌러보기도 하고 예전에 뛰어다니던 동선을 따라 천천히 걸어보기도 했지만 감각은 전혀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타임캡슐은 찾을 수 없었다.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다리를 올리고 누워 있으니 그제야 서서히 아주 오래된 기억들이 떠올랐다. 잊어버린 타임캡슐 속 물건들이 그제야 분명해졌던 것 같다. 미래의 나에게 쓴 편지 한 장, 몇 달 동안 용돈을 아껴 구매했던 하트 모양 열쇠고리, 연필 모양의 작은 지우개, 색이 반쯤 바랜 장난감 기차. 그때의 나는 흙 속 깊은 곳에 아끼는 물건을 숨겨두면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거라 믿었던 걸까.

미래의 나에게 쓴 편지. 어린 나는 어른이 된 나에게 기대를 쏟아붓듯 편지를 적어 내려갔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되었는지, 무슨 일을 하며 사는지, 상상 속의 나는 얼마나 예뻐졌는지. 지금 읽는다면 입꼬리가 어색하게 올라갈 만큼 솔직하고 소란스러운 문장들이 가득했을 편지가 기억나진 않지만 참으로 예상이 갔다.

그리고 그 기대들을 전부 채워주지 못한 현재의 나는 약간 미안함이 몰려왔다. 어린 내가 바라던 삶과 지금의 나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왔으니까. 어쩌면 타임캡슐을 찾지 못한 것은 다행일지도 모른다. 만약 그 틴케이스를 열어 보았다면 어린 나와 지금의 내가 똑바로 마주했을 테고 그 선명함은 오히려 잔인했을지 모른다. 그보다는 이렇게 기억과 상상 사이에서 서로를 흐릿하게 떠올리는 편이 더 평화롭다. 가끔은 그 타임캡슐이 아직도 흙 속 어딘가에서 조용히 잠들어 있을 것 같다. 열쇠고리는 심하게 녹이 슬었을 것이고 기차는 남아있던 옅은 색마저 모두 빼앗겼을 것이다. 편지는 알아보지 못할 만큼 눅눅해졌을지도 모르지만 그 속에 담아두었던 마음만큼은 여전히 그대로일 것이라고 믿는다. 찾지 못해도 괜찮다. 어떤 꿈을 꾸었는지도 어떤 사람이 되고 싶었는지도 이제는 정확히 떠오르지 않지만 그때의 마음이 지금의 나를 만든 건 분명하니까.

이건 잃어버린 물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오래전에 묻어두고 잊어버렸지만 어쩌면 그때부터 조금씩 이어져 온 나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더 이상 타임캡슐을 찾으러 가지 않아도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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