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그랬겠지만 어린 시절의 나는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감정이 어떤 모양인지 잘 알지 못했다.
나는 원래 나를 드러내는데 서툰 사람이었다.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이 무서운지 어떤 선택을 하고 싶은지 말하는 일이 늘 어려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친구 앞에서는 조금 달랐다. 해보지 않았던 일들을 해보게 되었고 망설이던 선택 앞에서도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그건 용기가 생겼다기보다는 넘어져도 괜찮을 것 같다는 막연한 확신에 가까웠다.
기억에 오래 남은 하루가 있다. 돌이켜보면 특별할 것 없는 순간들이었는데 이상하게도 그날의 장면은 또렷하게 남아 있다. 이야기를 나누며 한강대교를 건너던 날이었다. 발걸음은 가벼웠지만 다리 위에 올라서자 시선이 자꾸 아래로 향했다. 아래를 내려다보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무서웠다. 말로 꺼내지 않아도 그 기색을 알아챘는지 그 친구는 어느 순간부터 내 속도에 맞춰 걷기 시작했다. 바람은 세차게 불고 차들은 옆을 슝슝 지나갔지만 그 길은 더 이상 위태롭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날만큼은 장난이 끊기지 않았고 웃음도 자주 흘러나왔다. 그렇게 이야기에 잠겨 걷다 보니 어느새 다리의 끝에 서 있었다. 무섭기만 했던 한강대교는 그날 이후로 시원한 바람이 솔솔 불고 또렷한 달이 인사하던 가장 좋은 가을의 기억으로 남았다.
평소에도 우리는 버스를 타면 금방 도착할 거리를 일부러 걸어가며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발걸음을 멈추고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사소한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고 아쉬움이 남으면 같은 거리를 몇 바퀴 돌며 길을 따라 장난을 치기도 했다. 목적지에 도착해도 곧바로 발걸음을 돌려 한동안 더 걸으며 이야기를 이어가기도 했다. 그런 시간 속에서는 특별한 주제를 다루지 않아도 충분했다. 발밑에 스치는 낙엽 소리까지 모든 것이 대화의 배경이 되어 주었으니깐. 사소한 말과 웃음 속에서 서로의 생각과 꿈을 조심스럽게 꺼내 놓았고 어딘가에서 겹치는 지점을 찾아보기도 했다. 꼭 같은 곳을 바라보지 않아도 비슷한 방향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충분했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시간은 늘 같은 자리에 머물러 주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조금씩 멀어졌고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작은 어긋남들이 하나둘 쌓인 결과였다. 가끔 소식을 확인하듯 휴대폰 속 흔적을 더듬기도 했지만 그마저도 점점 희미해졌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는 이름조차 들리지 않게 되었고 그 사람이 내 삶에 실제로 존재했는지 잠시 의심이 들 정도로 얼굴과 목소리가 서서히 흐려졌다. 그리움은 남아 있었지만 그것조차 일정한 거리를 두고 멀찍이 흘러가고 있었다. 지나간 시간 속에서 천천히 흩어지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좋아했던 사람인 동시에 좋은 친구이기도 했던 존재였다. 그래서 더 조심스러웠는지도 모른다. 사라질까 봐 무서웠고 잃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관계에 이름을 붙이는 순간 되돌릴 수 없는 무언가가 생길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생각이 나를 멈추게 했다. 지금에 와서야 알게 되었다. 생각이 짧았다는 것을. 끝나는 건 연인 관계만이 아니라는 것도, 친구 사이 역시 한 번 멀어지면 예전으로 돌아가기 어렵다는 것도 그때는 알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았고 그 선택하지 않음이 결국 가장 큰 변화를 만들어냈다.
요즘은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내 기억 속에서 흐려지는 만큼 그 친구의 기억 속에서도 나는 점점 옅어지고 있을까 하고. 애초에 그렇게 오래 남을 만큼의 사람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닿으면 마음은 조용히 가라앉는다. 숨을 고르듯 천천히 그날의 웃음과 말투마저 흐릿해지는 느낌이다.
너 역시 알았겠지만 그 시절의 나는 너를 꽤 많이 좋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