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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슬기 Apr 09. 2023

퇴사자는 집에서 무엇을 하는가

퇴사가 벼슬은 아니지만 12

지난 화에서 배낭여행, 한 달 살기를 하지 않는 퇴사자임을 천명을 했다. 그럼 '어디 안 가'는 퇴사자는 집에서 무엇을 하는지, 그 다음으로 친구들은 궁금해했다.(이 글들은 철저히 지인들의 궁금증을 해소해주는 측면에서 시작된다.)


지난해 12월 8일에 퇴사한 나는 12월 한 달은 생각없이 놀기로 했다. 당연히 늦잠부터 잤다. 여러 소설들에서, 에세이들에서 직장 다닐 때는 그렇게 잠이 많다가 백수가 되니 딱 출근 시간에 눈이 번쩍 뜨이더라는 글들을 봤는데 나에게 그것은 클리셰일뿐 나의 실상은 아니었다. 잠 많은 벼슬기는, 백수가 되자 나의 본능을 충분히 활용하여 딥-딥-딥-슬립을 했다. 빠르면 오전 10시, 늦으면 11시쯤 느지막하게 기상을 했다. 침대의 발치에는 두 냥이들이 있는 힘껏 기지개를 켜가며 자고 있었다. 하루 18시간을 잔다는 고양이들의 수면 패턴과 거의 비슷한 삶을 살았다.


책은 잘 읽지 않았다. 시간 많을 때 책을 많이 읽으라고, 조언을 많이 들었지만 나는 직장인일 때보다 더 책을 멀리 했다. 기자로 일할 때 일 때문에 책을 읽을 일이 많았던 나로서는(2년 반을 책기자로 지냈기 때문에 다른 기자들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독서=일'로 느껴졌기 때문에 더욱 책을 펼치기가 싫었다.


그렇담 다들 예상하는 넷플릭 정주행일텐데, 난 넷플릭스에 가입조차 안 했다. 요즘 회자되는 콘텐츠들에 별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들을 안 보면 각종 단톡방에서 소외되는 기분이지만, 소외되지 않겠다고 관심 없는 콘텐츠를 보는 것은 내 기준 더 싫은 기분이기에 더욱 가입을 안했다. 퇴사까지 했는데, 철저히 나 하고픈 것만 해야지! 시류를 좇는 건 기자하며 실컷 했잖아.


넷플릭스를 안하는 내가 대신 열광하는 것은 티빙이다. 내가 사골처럼 재탕 재재탕을 해가며 보는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들은 죄다 티빙에 있기 때문이다.  백수가 되고 간만에 다시 우리기 시작한 드라마는 <삼국지>였다. <삼국지>는 <섹스 앤 더 시티>와 함께 나의 인생 드라마다. 책을 좋아하지만 책 <삼국지>는 차마 다 읽을 수 없었던(전투씬에 대한 묘사가 너무 천편일률적이라 좀 지겨웠다) 나에게 드라마 <삼국지>는 좋은 대안이었다.

 

한 사람의 기호를 이루는데 있어서 유년 시절이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치는지는, 내 생애를 걸고 증명할 수 있다. 나는 어려서 <용의 눈물>이나 <태조 왕건> 같은 사극을 빼놓지 않고 봤다. 일기에 딱히 쓸 게 없으면, 그날 본 사극 감상문을 썼다. 엄마가 적극 권했기 때문인데, 그 시절 엄마는 그런 식으로 나의 호연지기를 길러줬던 거 같다. 그래서 <용의 눈물>에 나오는 유동근 아저씨나 <태조 왕건>의 최수종 아저씨는 감히 내가 감정이입할 수 없는 존재임에도, 나는 곧잘 내 얘기처럼 눈과 팔에 힘을 줘가며 열심히 봤다.


10여 년 전, 언론사 입사를 노리던 취준 시절에 드라마 <삼국지>를 처음 만났다. 백수 기간이 길어져, 서울 원룸 생활을 청산하고 평택에 있는 부모님 댁으로 낙향했을 때의 일이다. 기분이 참담한 가운데, <삼국지>를 보면 절로 기분 전환이 됐다. 가진 건 관우·장비 밖에 없던 돗자리 장수 유비가, 알고 보면 순 날건달에 가까운 조조가 회차를 거듭하며 버섯 먹은 마리오 마냥 쭉쭉 커가는 모습은 나에게 카타르시스를 선사했다. '세상이 아직 나를 못 알아본 것 뿐이다' 하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함께 쑥쑥 자라났다. '조조가 바위란 법도, 유비라 계란이란 법도 없지요' 하는 유비의 대사를 마음 속 깊이 간직하고, 언론사에 면접을 보러 갈 때마다 그 말을 되새겼다.


10년 만에 다시 보는 <삼국지>는 그 때 그 시절을 환기하는 동시, 다시 백수가 된 나의 처지를 환기했다. 마인드컨트롤이 중요한 백수에게, <삼국지> 같은 드라마는 일종의 정신적 자양강장제 같은 역할을 한다. 문자 그대로 '방구석 여포'더라도 어느 정도의 기세는 있어야 밖에 나가서도 여포든 조조든 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집에 있으면서 나도 모르게 쪼글쪼글해지는 마음을 펴는 다리미 역할을, <삼국지>가 하는 것이다. 그렇게 퇴사 후 꼬박 몇주를 집에서 앉아, 혹은 사람을 만나러 서울을 오고 가는 길에 꼬박꼬박 본 결과 <삼국지> 95화를 새해가 되기 전 다 시청했다. 


가끔 인스타그램 피드에 <삼국지> 사진을 올리면 "언니, 삼국지를 봐요?" 하는 댓글이 달렸다. 나도 안 다. 내가 얼마나 아재스러운지를. 그러나 나에게 삼국지는 '좋은 걸 어떡해'의 영역인걸. 가끔 또 마음이 쪼그라들 때면, 꺼내서 잘 다릴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조조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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