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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슬기 Apr 17. 2023

'진로 고민 중'으로 <나는 솔로>에 나갈 수 있을까

퇴사가 벼슬은 아니지만 16

나는 '연애주의자'였다. 성인이 된 이래로는 늘 연애하는 상태를 희구하고, 인생에서 제일 재미나는 순간이라 여겼다. 오죽하면 구구절절 연애 칼럼도 썼었다. 30대 초반부터 친구들이 하나둘 결혼하기 시작하자, 연애는 더욱 절실해졌다. 고정적으로 같이 노는 상대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페미니스트지만 비혼주의자는 아니기 때문에, 인생에 한 번은 결혼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다.


그러나 서른다섯을 기점으로는 연애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퇴사를 하면서는 '내 인생에 결혼은 없을 수도 있겠다'는 사뭇 비장한 각오까지 곁들였다. 왜냐면 어느덧 연애 시장이 굉장히 자본주의적인 영역으로 수렴한 것을 목도했기 때문이다.


지난해 가을, 친구가 소개팅 제안을 해왔다. 해당 남성의 사진과 직장, 나이, 키, 집 보유 유무가 적힌 한 줄 프로필과 함께였다. 사진과 직장, 나이, 키까지는 몰라도 집 보유 현황은 소개팅 명세서로 처음 보는 포맷이었다. 친구도 직접적으로 아는 분은 아니며, 중간에 얽힌 다른 중매자(?)로부터 건네 받은 프로필이라 했다. 그렇게 먼저 제안이 온 이상, 나도 그 양식대로 맞춰서 보내야할 터였다. 당시 기준으로 'S신문 기자/35/163cm/집 있음(그러나 서울 아님, 빚 많음)'이었을테지만 나는 보내지 않았고, 소개팅은 안하겠노라고 '선포'했다.


서른 초반때까진 늘 소개팅해달라고 주변인들을 조르던 사람이 나다. 그러나 이제는 저런 경쟁입찰의 장에 나를 부러 끼워넣을 자신감이 생기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결혼을 예비해서 경제적인 걸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나이대인데, 나를 떠올리며 나와 '급'이 맞는 사람을 필연적으로 찾을 친구를 떠올리기도 싫다. 물론 나도 그 '급'을 견주는 인간이라는 데서 자유롭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더더욱 그러저러한 인생사의 실밥들을 직접 목도하고 싶지 않다. 게다가 나는 여자의 인생에서 임금이 가장 피크를 찍는 때라는 30대 중후반의 초입을 백수로 시작하는, 세상 비효율적이고 불안정한 사람이 아닌가.


나보고 '나는 솔로'에 나가보라는 이들도 더러 있었다. '전직 연애 칼럼니스트'라는 경력이 눈길을 끌 거란다. 온갖 구설에도 불구하고 나는 현시점 결혼 전제 연애를 강력하게 바라는 사람은, 거두절미하고 결혼정보회사에 가입하거나 '나솔'에 나가는 편이 빠를 거라는 생각도 든다. 그런 얘기를 들으면 난 웃으며 "'나솔'에 '진로 고민 중'으로 나갈 순 없잖아. 나라도 그런 남자는 안 택할걸"하고 만다. 그럼 돌아오는 대답은 "야, '나솔'에 '이직 준비 중'으로 나오는 사람도 많아"다. "'이직 준비 중'만 해도 하고자 하는 일은 정해져 있고, 그걸 위해 준비한다는 거잖아. 나는 아예 별 생각이 없는걸."


나만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연애 상황에서의 경제적 비대칭으로 탄생하는 모종의 '갑을 관계'에 꽤 민감한 편이다. 스물 초반의 연애 때부터 나는 연인 사이 미묘한 갑을 관계에 직면했다. 당시 나는 나이 차가 좀 나는 직장인 남자친구를 사귄 적이 있었다. 자연히 없는 살림에, 돈 씀씀이는 한 쪽으로 기울 수 밖에 없었는데 기운 것은 돈 씀씀이 뿐만이 아니었다. 가령 내가 죽고 못 사는 치킨에 관해서, 내가 ‘양념치킨’을 먹자하면 그는 ‘후라이드’를 주장하는 식으로 그와 나의 입맛은 조금씩 어긋났다. 그때마다 그는 혀를 쏙 내밀며 “내가 돈 내니까 내가 먹고 싶은 거 먹어도 되지?”라고 했다. 그 때 비슷하게 벌이가 거의 없는 요즘에 이르러 다시 연애를 한다면 그때와 비슷한 양상이 벌어지지 않으리란 법이 없다.


결혼은 아무래도 안정을 희구하는 사람들이 선택하는 챕터인데, 첫 만남에서부터 불안정한 위치에 있는 사람을 고르는 일은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고서야 주저될 것이다. 나도 비슷한 생각이기에 그런 상대의 마음도 알겠고. 게다가 나는 연애 상대를 주로 소개팅으로 수급하는 사람이었는데(연애 전력 중 '자만추' 경험이 20대 초반의 두 번 밖에 없다) 그 소개팅이 그 새 무서운 전장으로 탈바꿈해 더더욱 출전할 의욕을 잃는다. 그렇다고 주변에서 만나자니, 주변에 남성으로 일컬어지는 생물체가 이제는 도통 없다...!


연애 없는 삶이 그럭저럭 괜찮게 된 까닭에는, 인생살이가 깊어지며 혼자 서는 법을 잘 익히게 된 덕도 있다. 살면서 나는 무엇보다 자유가 중요한 사람임을 점점 더 알게 되었는데, 때로는 연인의 존재 자체가 나의 자유를 방해하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결혼을 얘기하던 남자친구가 있던 시절에 나는, '퇴사'를 입에는 담을지언정 결행할 용기까지 내진 못했다. 미래 경제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든든한 파트너가 돼야 한다는 의식 때문이었다. (물론 모두가 이렇다는 것도, 모두가 이래야 한다는 것도 아니고 경제적 자존감(?)이 부족한 나의 얘기다.)


연애 안 한지 1년하고 2개월. 긴 기간은 아니지만 나는 이제서야 '연애 안하는 나'를 디폴트로 여기고 편안해한다. 그거면 됐고, 그거라서 좋다.  


<나는 솔로> 3기의 출연자 종수. 저 말을 빌려 나의 상황을 설명하면, '최근에 하고 싶은 일이 없어 진로 고민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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