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벼슬기 Apr 19. 2023

퇴사자도 술이 고플까

퇴사가 벼슬은 아니지만 17

술을 좋아한다. 좋아한다는 것의 기준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술을 좋아한다'는 말을 스스로 하고 싶어하는 지경이라면 좋아하는 것 아닐까. 좋아한다는 마음 자체를 측정한다는 것이 어불성설이라는 점에서도, 쨌든 나는 술을 좋아한다.


사람마다 술을 찾는 이유가 있겠지만 나는 기분이 좋을 때, 혹은 과열된 머릿속을 식히고 싶을 때 주로 찾는다. 기분이 나쁠 때는 찾지 않는다. 술은 어떤 감정이건 증폭시키기 때문이다. 연인과 헤어졌을 때 되레 술을 먹었다가 한 잔에 들뜸, 두 잔에 쌍욕, 세 잔에 침통, 네 잔에 비관, 다섯 잔에 엉엉, 여섯 잔에 '자니...'로 이어지는 매커니즘은 그래서 자연스럽다. 그래서, 이별 직후 같은 시즌에 나는 절대로 술을 찾지 않는다.


회사를 다닐 때는 주로 머리를 식히려고 술을 마셨다. 알콜 의존이 의심되리만치 술에 집착하던 시즌이 있었다. 코로나19 여파로 재택 근무가 이어지던 문화부 기자 시절이었다. 주로 책을 읽고 기사를 쓰던 당시 업무 특성상 근무 시간에는 쉴 틈 없이 책을 읽어제끼고 마감 때면 '다다다다' 옆에 있던 냥이도 놀랄만치 공격적인 타이핑을 했다. 그렇게 마감이 끝나고, 온라인으로 출고된 기사와 지면에 앉혀진 기사의 오타를 확인하고 나면 긴장이 스르르 풀렸다. 몸은 더없이 녹초인데 머릿속 뇌만 활황 상태인 그 기분을 아는가. 전두엽에 찬물이라도 뿌려 모든 활동을 정지시키고 싶은 기분. 출근자라면 지하철을 타고 퇴근하며 음악도 듣고 유튜브도 보는 그 시간이 나름의 리추얼이 되어 과부하가 걸린 뇌의 연착륙을 돕는데, 재택 근무자에겐 그럴 기회가 없다.


대신에 나는, 술을 선택했다. 그 즈음에 빠져 있던 화이트 와인을. 2만원 안팎의 값싼 뉴질랜드산 소비뇽블랑을 하루종일 냉장고에 칠링해둔다. 필수 조건은 코르크가 아닌 스크류캡 형태의 입구를 가진 와인이어야 한다는 거다. 와인 한 병을 한꺼번에 비우기는 부담스럽기 때문에, 먹다 남겨도 비교적 보관이 용이한 스크류캡 와인을 선호한다. 그렇게 매일, 마감이 끝나는 시간에 와인 뚜껑을 연다. 입술을 최대한 오므려 미세한 기포를 느끼다가(이렇게 마시면 스파클링 와인이 아니더라도 웬만한 화이트 와인엔 모두 기포가 있다) 천천히 목구멍으로 흘러넘긴다. '쨍그랑'하는 산미가 입 안에 기분 좋게 퍼진다. 아, 퇴근이여.


그렇게 사흘에 한 병, 또는 이틀에 한 병의 와인을 비운다. 온 하루가 그 순간만을 향해 달려가는 느낌이었다.


한창 워킹 캣맘이던 시절의 짤.

퇴사를 하고는 한동안 집술에 심취했다. 퇴사자는 다음날 출근이 없으니 혼술도 용이하다. 그러나 이 시절 나는 혼술보다는 집에서 여럿이 자주 함께 마셨다. 인생에서 가장 넓은 집으로 이사한 김에, 친애하는 동료들과 선후배, 친구들을 집으로 불러 와인 등을 마셨다. 우리집은 서울에서 먼 대신에 약간의 교외(?) 느낌이 나고, 개 못지 않게 인간 친화적인 고양이 두 마리가 있어 방문객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친구들에게 이것저것 요리를 해주는 재미도 있었다. 나와 좋은 시절을 함께 한 동료, 친구들에게 보내는 나만의 성의 표시였다. 불금이나 토요일에 느긋하게 와인을 마시며, 퇴근 후 맥주 한 잔에서는 느낄 수 없는 여유를 즐겼다. 이렇게 술을 마셔야, 대화 얘기도 회사 얘기에 국한되지 않고 일과 사랑, 미래 등으로 두서없이 뻗어나간다.


<퇴사자의 술상> 베이직 ver
<퇴사자의 술상> 한식 ver
<퇴사자의 술상> 이태리 ver

그걸 한 바퀴하고 났더니 살짝 현타(?)가 왔다. 돌려막기할 음식 가짓수가 더는 없기도 했고, 재정적으로도 부담이 됐기 때문이다. 난 하필 와인을 좋아하는데 와인은 병당 가격이 1~2만원이며, 또 맛없는 것은 싫어하는 나의 특성상 안주를 만드는데 꽤 재료비가 들어갔다. 그리고 대화 주제 중에는 꼭 '나의 퇴사 이유'가 들어갔는데, 같은 얘기도 수십번하다 보니 스스로도 좀 젠 채 하는 거 같고 별로였다. 그렇게 집에서 여럿이 마시는 술이 점점 줄어갔다.


혼자 마시는 술이나 밖에서 마시는 술 자리도 다소간 줄어들었다. 왜냐하면 내가, 별로 술을 안 마시고 싶었기 때문이다. 앞에서 나는 '머리를 식힐 때' 술을 찾는다고 했다. 그러나 퇴사자가 되면, 머리를 식힐 일이 없다. 늘 식어(ㅋㅋㅋ)있기 때문이다. 하루 종일 긴장할 일이 없기 때문에, 부러 술을 마셔 이완할 필요도 없다. 술을 마시면 되레 몸만 더 늘어질 뿐이다.


그러나 나랑 만나는 직장인 친구들은, 여러가지 이유로 술을 마시고픈 상태이기 때문에(그들에겐 술이 필요하다) 나하고는 욕망의 미스매치가 자주 일어난다. 내 친구들 중에는 나처럼 술을 좋아하는 이가 많고, 내가 '벼술기'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나와 만날 때는 자연스레 술 자리를 예비할 때가 많다. 그때 여러 이유로 내가 술을 피하면, 친구 얼굴에서 참을 수 없는 섭섭함이 피어오르고 그럼 나도 절로 미안해지고…


지금은 이렇지만 바야흐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계절, 술 마시기 좋은 계절 여름이 다가오기에 앞으로는 또 내가 어떻게 바뀔지 모른다. 불닭바베큐에 '히야시'된 맥줏잔에 담긴 생맥 한 잔, 과일 안주에 마시는 화이트 와인, 평냉에 소주 등등이 생각나겠지. 술 좋아하는 나를 너무 탓하지도 않으면서, 그렇다고 폭음하지 않고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며 술을 먹는 나를 유지하는 게 올 여름의 목표다. 아자 아자 할 수 있다, 벼수ㄹ... 아니 벼슬기.

작가의 이전글 '진로 고민 중'으로 <나는 솔로>에 나갈 수 있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