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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슬기 May 19. 2023

우취는 우천취소일까 우중취기일까

야구라는 기쁨과 고통 1

국내 여행을 좋아한다. 대학 시절 내일로 2번에 농수산식품부 인턴 기자를 하느라 농산어촌을 쏘다닌 경험이 있다. 국내 여행은 적당히 생경하고 적당히 익숙한 게 마음에 든다.


최근에는 야구에 푹 빠지게 된 고로, 응원하는 고향팀 NC의 경기를 보러 마산에 가고 싶어졌다. 사실 야구는 잠실에서 봐도 좋다. (고척은 별로다. 돔 구장 특성상 공기가 텁텁해서.) 잠실 한복판에서 "쌔리라!", "쫌!" 하며 응원하는 것은 나에게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줬다. 서울에 유학 온 이래 사투리는 숨겨야 하는 것, 자연스럽지 않은 것 등의 취급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울의 경남 사람처럼 잠실의 NC 팬도 매우 소수여서, 홈 구장에 가서 홈 어드밴티지를 물씬 느끼며 응원하고 싶어졌다. (거기에 더해 창원 엔팍은 새로 지어져 나름 메이저리그 구장스럽다고 선전했던 나와 이름이 같은 슬기 기자님의 뻐꾸기도 나의 관심을 동하게 했다.)


2023년 5월 18일. 광주민주화운동 43주년의 그 날, 나는 오전 11시  49분 여의도에서 방송을 마치고(나는 2월 말부터 KBS1라디오 '신성원의 뉴스브런치'에 출연 중이다.) 바로 고속터미널로 향했다. 짐은 백팩과 에코백이 전부. 고양은 상대적으로 교통편이 안 좋기 때문에 서울에 나온 김에 바로 내려가자는 심산이었다. 점심으로는 파리바게뜨에서 크림치즈와 블랙 올리브가 잔뜩 들어 느끼한 베이글과 뚜레쥬르에서 라지 사이즈 아이스 카페라떼를 사서 버스에서 먹었다.


서울에서 마산까지 버로 4시간 10분. (3시간 50분이라 적혀 있었으나 실지로는 4시간 10분이 걸렸다.) 무료한 시간은 가져온 책인 <시드니>로 달래기로 했다. <시드니>는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 특파원으로 파견된 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굉장히 사적인 올림픽 리포트이자 여행기다. 언제 일어났고 뭘 먹었으며 시드니 사람들은 인상이 어떻고 하는 얘기를 주절주절 써놨는데 퍽 재미있다. (지금 이 글을 한 번 써봐야겠다고 맘 먹은 계기가 됐다.)


마산에 머물 기간은 2박 3일. 1일 1경기로 도합 3경기 직관을 예정하고 가는 길이지만 내려가면서부터 불안함은 엄습했다. 남부지방으로 내려갈 수록 하늘이 찌뿌드드하더니 구미쯤 와서는 비가 한두방울씩 내리기 시작했다. 인스타로 본 엔팍에는 비가 꽤 내리고 있었다. 우천취소일까 아닐까 신경을 곤두세우며 계속해서 기사를 뒤적였다. 우천취소 결정은 경기 3시간 전 그라운드 상태를 보고 결정한단다. 오후 4시쯤, 결국 결정이 났다. '오늘 경기는 비로 취소되었습니다.'


우취를 알리는 NC 투수 페디의 공지. Aradda...


오후 4시 50분쯤, 마산고속버스터미널에 내렸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숙소가 있는 오동동까지는 버스로 30분 남짓. 꽤 거리가 있었다. 저녁 약속까지는 2시간 남짓 남았고, 장소는 비교적 터미널과 가깝다. 그렇담 굳이 숙소로 갈 필요는 없지. 일단 우취로 헛헛한 내 마음부터 달랠 필요가 있었다.


걸어서 10분 거리인 신세계백화점 마산점에 갔다. 나에겐 신세계 상품권 5만원권이 있었고, 요즘 부쩍 나이키 바막을 사고 싶었으니까. 낯선 곳에서의 쇼핑은 더욱 사람 맘을 흥성거리게 하는 법이니까. 별 생각없이 백화점으로 직행했다.


백화점엔 사람이 없었다. 한 층에 쇼핑객이 5명 안팎. 이쯤되면 신세계가 여기서 자선 사업을 하고 있나 싶은 정도였다. 유유히 6층의 나이키 매장으로 직행해서 두 가지 디자인의 바막을 입어보곤 첫번째로 입었던 베이직한 디자인을 골랐다. 나이키 바막은 집에도 있지만 그건 너무 얇고 사이즈가 작다. 이번엔 반대로 사이즈가 넉넉하고 살짝 두께감이 있는 걸로 골랐다. 89,900원. 상품권에 39,900을 더해 결제했다.


에스컬레이터로 내려오는 김에는 더바디샵에 들러 입욕제도 샀다. 숙소에 거대한 욕조가 있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욕조에 풍덩은 호텔에 묵을 때나 누리는 호사다. 자몽향으로 3800원에 샀다.


그리고 10분쯤 걸어, NC파크로 간다. 비오는 야구장을 휘릭 본 후, 전국 최초(?) 야구장뷰라는 스타벅스 창원NC파크점으로 갔다. 갔더니 정말로 야구장이 한 눈에 보이는 테라스석이 있다. 경기가 있을 때는 '테라스 SET'를 구매해야만 갈 수 있는 자리인데, 비경기일일 때는 제약이 없어보였다. 원정 직관을 왔다가 우취를 맞닥뜨린 몇몇 SSG팬들이 유니폼을 입고 인증샷을 찍고 있었다. (원래 이날 예정된 경기는 NC와 SSG의 3연전 마지막 경기였다.)


나는 화장실에 들러 챙겨온 애슬레저 룩으로 갈아입고(원래는 방송 출연룩으로 옥스퍼드 셔츠에 청바지를 입었다) 디카페인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함께 테라스석에 앉았다. 비오는 야구장, 비맞는 방수포가 보였다. 인증샷을 찍고, <시드니>를 읽다말다 하며 앉아 있었다. 우취라고 해서 비분강개하는 마음까진 들지 않았다. 어차피 보려던 3경기 중 하나일 뿐이니까, 언제 또 방수포뷰를 보겠어, 하는 마음으로 제법 의연하게 앉아 있었다.



저녁 약속 장소는 교동동이었고, 엔팍에서는 버스로 30분 거리였다.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가는데 덩치가 산만한, 젊은 남자들이 몇몇 보였다. 우취로 퇴근한 NC 선수들인가 싶어 나도 모르게 유심히 바라봤다. 대략 송명기, 오영수 등과 인상착의가 비슷해뵈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당연히 아니었다.


교동동에 있는 야키토리집(이름은 교동동 꽃집이다)에서 슬기자님과 조우했다. 슬기자님은 나와 성과 이름이 같은, 이곳의 기자님이다. 우리는 각기 일간지에서 문화부 기자를 한 전력이 있는데(슬기자님은 현역이다!) 그때 알게 된 문인들이 서로의 존재를 서로에게 알려주었다. 이름이 같고, 고향이 같고, 나이도 같고, 출입처가 같은 기자 둘의 출몰은 흔한 일은 아니다. 인스타 DM으로 연락하다 4년 전 쯤 서울 을지로에서 처음 만났고, 지난달에는 신사동 가로수길에서 만났다. 그때 슬기자님이 엔팍 직관 한 번 오라고 나를 꼬드겼었고, 나는 홀랑 넘어갔다.


F&B에 정통한 슬기자님 추천 야키토리집에서 테라 생맥에 꼬치구이를 골고루도 먹었다. 엉덩이살, 다리살, 목살, 닭껍질, 타마고, 츠쿠네. 본 간장 소스 특유의 달달달달구리한 맛이 입안을 휘감을 때, 맥주로 쓸어내렸다.  (진실로 일본 음식은 맥주가 없이는 한 입도 먹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특히나 타마고를 먹을 때  맛은 절정이 됐다. 한낱 달걀이 어쩜 이리 맛있을 수 있지. 우적우적 먹었다.



2차로 간 곳은 마산의 구도심, 창동에 위치한 LP바 '해거름'이었다. 1978년생이라는, 나보다도 10살이 더 많은 술집. 말로만 듣던 창동에 게 된 것이 신기했다. 10여년 전, 내가 중학생이었을 당시 마창진 학생들에게 '시내'란 마산의 창동이었다. (고등학생이 되었을 무렵엔 시내가 창원 중앙동으로 옮겨갔다.) 진해의 중학생이던 나는 감히 마산까지 원정갈 엄두는 내지 못했고, 고등학교를 창원으로 진학하게 돼서 이후로는 더욱 갈 일이 없었다. 2010년 통합 창원시가 출범하여 갑자기 마산까지 내 고향으로 강제 편입됐지만, 여전히 마산은 나에겐 미지의 도시 생경한 곳이다.


처음 왔으되 대충 알법한 쇠락한 구도심의 모습을 한 창동의 바에서, 나는 기네스를 슬기자님은 호가든을 시켜 마셨다. 해거름은 비가 와서 더욱 담배 냄새가 콤콤히 고인, 오래된 바의 전형을 하고 있었다. 주인분이 쪽지와 볼펜을 건네서, 거기에 신청곡도 꼼꼼 적어 넣었다.


데미안 라이스의 'the blower's daughter'와 보아의 'moon & sun rise'가 흐르던 '해거름'. 당연히 두 곡은 우리의 신청곡이다.


우리는 여러 얘기를 했다. 일과 사랑, 사랑과 일... 신기하게도 우리는 삶의 주기가 여럿 겹치는 지점들이 있었고, 그래서 나눌 얘기들이 더 많았다. 우리는 이름이 같아서, 만날 장소를 누가 예약하든 예약자 성함은 '이슬기'라는 편의성을 띤다. 같은 꼴의 이름을 가진 이가, 어떤 꼴로 살든 응원하겠노라고 속으로도 밖으로도 생각하고 말했다.


나의 숙소와 슬기자님네 집은 둘다 창동에서 가까워, 우리는 비에도 불구하고 걷는 길을 택했다. 숙소에서 늦은 체크인을 하고 젖은 옷들을 말리고 급히 씻어 자리에 누웠다. 모텔과 호텔 사이쯤 되는 숙소는 광활한 방크기를 가지고 있어서 적이 맘에 들었다.


시계를 보니 밤 11시가 갓 넘은 시각. '우리 고양이들은 뭐하고 있을까' 곰곰 생각하며 잤더니, 아니나 다를까 꿈에 내 고양이 서울이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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