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나에게 붙은 직함은 '프리랜서 기자'다. 기자가 싫어 언론사를 그만 뒀건만, 여전히 기자로 살고 있다. 인생 뭘까, 싶다.
책 초고 작업이 한창이던 2월하고도 중순.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010으로 시작하는 번호였다. 백수 세 달 차의 경험상, 010으로 걸려온 전화는 은근 영양가 있을 때가 많았다. 02나 070 등으로 시작하는 전화들이 대부분 광고거나 설문조사 전화라면, 010으로 시작하는 전화는 강연 제안이라거나 안부를 묻는 옛 취재원일 경우가 많았다. 그날도 '어라?'하며 전화를 받았다.
"네~"
"이슬기 기자님이시죠?"
그날 나에게 전화를 걸어온 이는 스스로를 KBS1라디오 <정용실의 뉴스브런치>의 PD라고 소개했다. 여성의 시각으로 본 뉴스를 전하는 프로그램에서, 3월부터 매주 목요일 패널로 출연해 줄 수 있느냐는 섭외 전화였다.
"좋죠. 근데 저를 어떻게 아시고…."
현직 기자도 아니고 퇴직 기자이며, 라디오 경험도 전무한 나를 어떻게 알고 전화했는지가 나로서는 의문이었다. 그것도 고정으로 쓰기에는 저쪽에서도 부담이 상당할텐데. PD님은 "어느 매체 어느 기자로부터 추천 받았다"고 했는데 그 기자마저 내가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풍선껌처럼 부풀어 오른 의문을 츄잉껌 씹듯 야무지게 씹어 닫고, 부지불식간에 들어온 알바를 만끽하기로 했다.
그렇게 2월 23일(원래는 3월 2일이 첫 출연이었지만 방송 사정상 일주일 앞당겨졌다), 나는 '방송하러' 여의도 KBS에 갔다. 본관 4층 스튜디오 앞에, TV서만 보던 정용실 앵커가 앉아 있었다. 방송에 들어가기 전 PD님, 작가님과 함께 '스몰 토크'를 나눴다. 앵커님과 작가님은 또 각자 다른 루트로, 나를 추천 받았다고 했다. 다 내가 모르는 이들이었다. 아마 그간 내가 써왔던 기사로서, 그들도 나를 판단한 것이리라. '내가 쓴 글 = 나'가 된다는 일견 당연한 사실을, 거기서 새삼스레 깨달았다.
오전 11시 5분부터 시작된 그 날 방송의 분위기를, 어렴풋이 그러나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날 주제는 보건복지부 발 '번개탄 생산 금지' 논란과 여성 지방 의원들이 성적 괴롭힘으로 겪는 어려움이었다. 전날 작가가 준 질문지에 부지런히 답변을 적어갔건만 원고엔 없었던, 의표를 찌르는 질문들도 간혹 있었다. 적잖이 당황해서 용수철 튀어 오르듯 즉답했다. "네, 번개탄 생산에 들어가는 질산칼륨이란…"
그날 시간이 흐르며, 나는 다소간 관조하는 자세로 방송이 흘러가는 과정을 지켜볼 수 있게 됐다. 그날 함께 출연한 패널인 평론가님과 함께, 방송이란 세 사람이 치는 삼각편대의 배드민턴과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 이 배드민턴은, 셔틀콕을 받는 상대를 이기고자 하는 경기가 아니다. 공을 더욱 잘 칠 수 있게, 부드럽게 넘기는 경기다. 그러나 너무 밋밋하면 경기를 보는 사람, 즉 라디오로 듣는 청취자들이 지루할 수 있기 때문에 간혹 스매싱도 날리고 아래서부터 어렵게 공을 걷어올리기도 한다. 이 눈에 보일 수 없는 랠리가, 어느 순간 눈에 보이면서 나는 방송이 재밌어졌다.
그날 처음 본 평론가님과의 합도 기분 좋았다. 기자인 내가 주로 사건 개요를 설명하는 역할을 맡고, 평론가는 주로 '평론'을 한다. 그러나 기사 쓰기와 달리 라디오에서는 꼭 말미에 해당 사안에 대한 내 의견을 물었다. 기자로서는 몇 달에 한 번 순번이 돌아오는 '기자수첩' 등을 쓸 때가 아니면 자기 의견을 잘 드러낼 일이 없고, 기사는 모름지기 엄정하게, 어느 한쪽으로 치우침이 없이 쓸 것을 요구받기 때문에 적잖이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또한 그 짧은 시간 내, 특정 사안에 대한 평을 한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할 말이란 무궁무진하게 많기 때문에. 그러나 평론가님의 평을 듣다보면 그 다음 내 발언 차례를 고려해 비워두는 행간이, 나는 느껴졌다. 혹은 나도, 혼자 A부터 Z까지 다 말하기보다 평론가님 순서를 위해 어느 한 켠은 비워두곤 했다.
그 날 방송이 끝나고 가장 많이 들었던 피드백은 "생방 처음 아니시죠?"였다. 처음답지 않게 안정적이고, 편안해 보인다고들 했다. 단언컨대 생방은 인생에 처음이었다. 물론 녹방(녹음 내지 녹화방송)은 꽤 했지만. 이후 나는 다른 요일의 땜빵을 두어차례 하다가 목요일에 이어 월요일도 고정 패널이 되었고, 진행자가 바뀌어 <신성원의 뉴스브런치>가 된 지금에서도 매주 월, 목요일에 출연 중이다.
이후 나의 삶은 묘하게 바뀌었다. 월, 목 고정적으로 출연하는 프로그램이 생기면서 무절제하게 늘어졌던 생활에 긴장감이 생겼다. 또한 퇴사 후 멀어졌던 시사 이슈들과 다시 가까워졌다. 뉴스 기사를 열심히 모니터링하는 한편, 신문 기자일 때처럼 여기저기 전화 돌리며 직접 취재도 한다. "아니, 기자가 싫어서 퇴사를 했는데 또 기자 일을?"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재미를 느끼는 내가 당황스러웠다.
일단, 라디오에 출연하며 나는 내가 말에 고팠음을 알게됐다. 언론사 입사 준비 시절, 나의 1순위는 신문보단 '방송기자'였다. 나는 방송이 체질이라고, 당시의 나는 생각했다. 고3 시절, EBS <장학퀴즈>에 5회 출연한 적이 있었다. 당시 학교대항전으로 바뀐 <장학퀴즈>에서, 나는 학교의 장으로 출연해 위기에 빠진 학교를 여러 번 구해내 최다승 타이 기록인 3승을 일궈냈다. 그 때 느낀 폭죽처럼 터지는 아드레날린과 도파민은 퍽 황홀했다. 역사의 현장을 실황 전달할 일도 많은 '방송 기자'라는 일이, 나에게 그런 도파민을 다시 한 번 선사해주리라 나는 믿어마지 않았다. 그리고 글보다는 말이, 내가 좋아하는 창구였기 때문에 더더욱 방송사로 취업하고 싶었다. 그러나 취준 기간이 길어지며, 그런 구분은 없어졌고 설상가상으로 방송사 시험에서는 거푸 고배를 마셨다. 2년 간의 취준이 끝난 후, 나를 받아준 곳은 신문사였다.
신문 기자로 일하면서도, 가끔 말할 일이 있었다. 토론회의 패널이나 강연자로 초청을 받았을 때, 혹은 회사에서 운영하는 유튜브에 출연할 때 등이었다. 문학 기자로 일할 때는, 팟캐스트에 고정 패널로도 나갔다. 문학 팟캐스트 <씨리얼문학관>에서 문학 이슈를 소개하는 역할을 맡았다. 진행자인 시인님들과 '최신 문학썰'로 수다 떠는 일이, 신선하고 재밌었다.
그런 경험들이 쌓여, 라디오 첫 출연에서 받았던 피드백("생방 처음 아니시죠?")이 가능했던 거 같다. 나는 퀴즈에 목숨 걸던 고3 시절부터 지금까지 승부욕이 이글거리는 욕망캐이며, 남들이 떨린다는 상황을 오히려 더 즐기는 '변태과'다. 라디오 출연 3회째에, 내 앞으로 놓인 마이크 사이사이에 낀 허연 먼지가 보였다. '아,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구나' 하는 각성이 요상한 편안함을 줬다. 물론 그렇다고 매번 긴장감을 안 느끼는 건 아니다. 여러가지 이슈를 다 포괄하기 때문에, 내가 자신 없는 이슈가 나올 때마다 내 밑천이 탄로나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될 수 없기에. 그리고 나에게 온 소중한 기회이기 때문에 '백수에게 이게 어디냐'하는 심정으로 매번 최선을 다해 마이크 앞에 선다.
라디오를 하면서는, 쓰는 것과 말하는 것의 차이에 대해 곰곰 생각하게 됐다. 말보다 글이 더 어렵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도 대부분 동의한다. 그러나 말이 어려운 것은, 특히나 라디오 생방처럼 편집이 불가한 곳에서는, 평소에 갖고 있던 나의 선입관이 부지불식간에 다 비어져 나올 수 있다는 점이다. 글은 여러번 고쳐 쓸 수 있지만, 말은 그러기가 어렵다. 아무리 부지런히 원고를 준비해간다 한들, 원고에 적힌 글만으로 말을 꾸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 자리에서 말을 즉흥적으로 주워담다 보면, 내가 감추고 싶었던 편견들이 술술 흘러나온다. 가령 나는 한 번 방송에서 "근시안적인 정책"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내뱉자마자 '아뿔싸'했다. 그런 혐오적인 언사가 단지 익숙하다는 이유만으로 내 입을 타고 흘러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때로 말은, 글보다 더 날카로운 비수가 된다. 글은 한껏 벼려서 누군가를 비판해도, 본디 차가운 속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읽는 이도 '그러려니' 할 수 있다. 글로는 한껏 조져도, 그 타격감이 덜할 수 있는 거다. 그러나 말로는 같은 톤으로 조져도, 거기엔 불이 붙는다. 객관의 영역으로 말을 하더라도, 듣는 사람 입장에선 충분히 기분이 나쁠 수가 있다. 가령, 나는 특정 공간의 여성 청소 노동자들이 직장 내 성적 괴롭힘 피해를 입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며 "이 분들이 대부분 저임금, 저학력의 노동자라는 이유로 일터에서 더욱 취약한 처지에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당시 나는 제작진에게서 '저학력'이라는 표현에 대해 "실제 그렇다 하더라도 직접적으로 언급하시면…"이라는 피드백을 받았다. 신문 기사에서는 객관을 표방하며 무시로 쓰는 표현이다. 그러나 더욱 가까운 매체인 라디오에서는 당사자가 직접 들을 수 있음도 상기해야 한다. 그 뒤로 나는, 내가 다루는 사건의 피해자 혹은 가해자가 직접 들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말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내가 라디오에 출연하며 들은 가장 반가운 피드백 중 하나는, 엄마 아빠에게서 왔다. 엄마는 "니가 하도 젠더 젠더 하길래 그러려니 했지만 기사로는 이해가 잘 안갔는데, 라디오로는 이해가 간다"고 하신다. 나는 기사를 쓰던 시절에는, (특히나 젠더연구소에 있을 때) 내 기사가 '친근'의 영역보다는 '최전선'이기를 바랐다. 젠더 관련 논의 가운데서 가장 날카로운 자리를 점하는 것이 비록 실패했을지언정 나의 목표였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늘 부모님이나, 편집 기자들로부터 "네 기사 어렵다"는 평을 들었다. 그러나 라디오를 하는 지금은 다르다. 내가 던져놨던 얘기들을, 최대한 쉽게 말하고 청취자들이 친근하게 받아들이게끔 하는 것이 목표다. 저명한 심리학자인 아주대 김경일 교수가 이성을 이기는 게 감정이고, 감정을 이기는 게 감각이라고 했던가. 라디오를 하는 나는 전에 없이 이성에 더해 감정과, 감각까지 포괄하려고 애쓴다. 그 '감각'에는 개인에 대한 호불호도 들어갈 것이다. 불호인 사람이 하는 얘기를, 귀담아 들으려는 청취자는 없을테니까. 어찌 보면 이성을 벼리는 일 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요즘의 나는 이런 고민들을 층층이 부여잡고, 여행지에 가서도 부지런히 이슈들을 톺아보며(프리랜서에게 진정한 '쉼'이란 없다) 그렇게 산다. 그러다보면 가장 궁극적인 질문, '나에게 기자란 무엇인가'가 남는데 퇴사 6개월째인 지금까지도 답을 못 찾았다. 단, 한 가지 욕망은 생겼다. 나는 말도 하고 글도 쓰며 살고 싶다. 그리고 둘다, 잘하고 싶다.(진짜 어마무시하게 큰 욕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