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 만족하냐고 물으면...
코로나 이후 학교 방문이 허락될 것 같아 1978년에 졸업한 고등학교를 찾아갔다. 이름도 바뀌었고(홍익여고에서 홍익대학교 사범대학 부속여자고등학교로), 건물도 다른 곳으로(마포구 와우산로 94에서 마포구 성미산로 51로) 이사했다. 대학교 안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가 같이 있어서 캠퍼스도 컸고, 대학교 축제 때면 축제를 곁눈질하느라 공부가 안 됐던 기억도 있는 곳이었다. 인문계고등학교인데도 방송제 위주의 축제를 강당에서 다른 학교 학생들도 초대해 꽤 크게 했던 기억도 있다. 대학교 안에 고등학교 건물이 같이 있어서 굉장히 자랑스러웠는데... 2012년 8월 마포구 성미산로 51 자리로 초등학교(홍익대학교 사범대학 부속초등학교), 중학교(홍익대학교 사범대학 부속여자중학교), 고등학교(홍익대학교 사범대학 부속여자고등학교)가 모두 이전했다고 한다.
분명히 시설이 더 좋아진 건 맞는데 왜 이렇게 허전할까? 고향에 갔더니 고향집이 없어진 것 같은 허전함이랄까? 이사한 곳의 새로운 건물도 낯설었지만 여고가 있던 자리(홍익대학교 내)도 너무 바뀌어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홍익대학교도 너무 커지고, 학생들도 너무 많아(지나는 내내 한국 학생들의 말보다는 외국 유학생들의 목소리가 더 들려...) 더 헤매고 다녔다. 요즘 대학생들은 어떻게 공부하나? 강의실을 제대로 찾을 수나 있을까 하는 걱정까지 들었다.
여고 시절은 좀 혼란스러웠다. 대학교 내에 있던 학교이다 보니 그 당시 '유치원, 국민학교, 중학교를 함께 다닌 동창들'이 있었고(지금의 산후조리원 동기처럼) , 그 아이들이 말하는 부유한 집 이야기(같은 유치원 출신이 많았다)가 듣기 어색했다. 나는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유치원 이야기가...
공부를 잘하지 못하면 그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할 것 같아 공부를 잘하는 무리에라도 끼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암기 과목은 못해도 수학은 뒤지지 않았다. 수학선생님을 좋아해서 수학 공부를 열심히 한 케이스로 <수학의 정석>을 끼고 다니면서 모르는 것을 질문하는 열혈 학생이었다. 밤새워 모르는 문제와 씨름하고 정답을 찾았을 때의 기쁨을 알아가던 시절이라고 할까... 그래서 상위권 레벨에 진입했지만 갑자기 가정사가 복잡해져 성적이 점점 하락하기도 했다.
고등학교 2학년 말인가 학교에서 특색사업으로 <다도수업>이 있었다. 조별로 진행하는 수업이었고, 학부모님을 초청해서 공개수업을 했다. 내가 조장이었는데, 수업이 생각하던 대로 되지 않아 몹시 짜증 나 있었다. 그런데 수업을 보러 오셨던 엄마가 '잘했는데 왜 그러냐고?' 하셨다. 엄마의 기대치와 나의 기대치가 달랐기 때문에 엄마는 잘했다고 느꼈고, 나는 불만이라고 느낀 것이리라... 오늘 홍익부여고에 갔더니 한복을 입으신 선생님이 <한복과 배례법> 수업을 하고 나오신다고 하셨다. 고등학교 시절 <다도수업>이 생각나 한참 동안 추억에 빠져들었다.
또 하나... 나는 수학을 좋아해서 내가 이과 타입인 줄 알았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되면서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문과를 선택해 2학년 내내 이과로 바꿀까 고민했던 적이 있었다. 바꾸면 대학 입시에 불리하다고 해서 그냥 문과에서 공부하긴 했지만 문과 공부보다 수학이나 화학을 더 좋아했다. 그런데 고등학교 3학년 때 국어 선생님이 수업의 한 방법으로 '시 하나씩'을 학생들에게 가르치라고 맡기신 적이 있다. 나는 한용운의 시 하나를 맡아 우리 반 아이들 앞에서 설명한 적이 있는데, 잘했다고 칭찬을 많이 해주셨다. 그때 선생님이 해준 칭찬이 나를 국어 교사로 이끈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중학교에서 고등학교 진학할 때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있었듯이 대학교 진학 때도 그런 일이 있었다. 오빠가 재수를 해서 나랑 같은 해에 대학교에 들어가게 되었다. 내가 대학교를 들어가게 되면 없는 집에서 대학생 이 둘이 되고, 하나도 힘든데 둘의 학비를 부담해야 했다. 할 수 없이 내가 취업을 하고, 나중에 야간대학을 다니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교장선생님 추천으로 은행에 시험을 치르게 되었다. 나는 고등학교 내내 암기 과목과 영어 과목에서 다른 아이들보다 뒤처졌다. 특히 영어는 도와주는 사람 없이 혼자 독학으로 공부하다 보니...(핑계이긴 하지만...) 그 당시 중소기업은행에 시험을 봤는데, 중소기업은행을 영어로 쓰라는 시험 문제가 있었다. 그 답을 못 써서 떨어졌다고 생각이 든다. 둘이 시험을 봤는데, 친구는 붙고 나는 떨어졌으니... 그래서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대학교 시험을 쳤고, 그 당시 좋은 대학교라 지칭하는 곳에 붙었으니 딸이라고 안 가르칠 수 없어서 엄마가 아들 딸 둘의 대학 등록금을 대느라 무척이나 힘이 드셨을 거라는 짐작만... 나도 대학교 3학년 <대학생 과외금지 조치>가 내려지기까지 아르바이트를 한 번도 거른 적이 없었다. 나중에서야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을 벌기보다 장학금을 받는 것이 훨씬 유리했을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그때는 어린 마음에 한 푼이라도 버는 것이 더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지금 여고시절을 되돌아보면 사립고등학교라 선생님들이 그 학교에 오래 계신 분들이 많았다. 그만큼 열과 성으로 가르치셨다고 생각된다. 그때 한문을 가르치신 홍신선 선생님은 나중에서야 유명한 시인이신 걸 알게 되었다. 고등학교 시절 한문 시간에 좀 말썽을 부렸는데, 지금이라도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화학 선생님, 수학 선생님, 국어 선생님 등 기억나는 분들이 꽤 많고, 졸업 후에 찾아가도 반가이 맞아주셨다. 그게 사립학교의 장점인 것 같다. 선생님들이 계속 근무하셨다는 사실...
운명이 정해져 있다는 말을 백 프로 믿을 수는 없지만 나는 내 의도와 다르게 인생이 몇 번 다른 길로 바뀌곤 했다. 그걸 운명이라고 하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지금 만족하냐고 물으면 후회는 없다고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