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산에 가서는 힘 자랑하지 말고, 홍성에 가서는 권력 자랑하지 말며
예산에 가서는 힘자랑하지 말고, 홍성에 가서는 권력 자랑하지 말며
1982년 충남 교원순위고사에 붙어 3월 1일이 아닌 3월 17일에 첫 발령(성적순으로 발령을 받았기에)을 받았다. 충남 홍성군 광천읍 광천중학교에... 충남교육청이 있는 대전으로 가서 발령장을 받는데 치마를 입지 않고 바지 정장을 입고 왔다고 장학사님께 혼이 나고는 서울로 다시 올라갔다. 치마 정장을 갖추기 위해... 그때는 어려서 사 입는다는 생각은 못하고 집으로 다시 돌아갈 생각만 했다. 광천으로 가기에는 시간이 늦었고 다음날 아침에 부임을 해야 하기에 할 수 없이 오빠가 데려다준다고 함께 택시를 타고 광천으로 갔다.(그때 서울에서 광천까지 택시값이 얼마였을까? 이제야 궁금해진다.) 하숙집을 정해주고 오빠는 서울로 돌아갔다. 40년 전 해프닝이다. 치마가 아니면 안 된다는 장학사님과 그 말 때문에 서울로 갔다가 택시로 광천까지 내려갔던 나...
시골이라고 생각했던 광천은 그 시기에는 나름 큰 도시였다. 그 시기에 '예산에 가서는 힘 자랑하지 말고, 홍성에 가서는 권력 자랑하지 말며, 광천에 가서는 돈 자랑하지 말아라'라는 말이 있었다. 광천은 배가 들어오던 곳이고, 토굴 새우젓, 광천 김이 유명한 곳이라 돈도 많고 뱃사람들이 많아 거친 학생들이 많았다. 조금 힘들었지만 그래도 첫 학생들이라 정이 많이 들었다. 지금도 가끔 한두 명은 소식을 전해온다.
나는 고향이 서울인 서울 촌놈이라 시골 생활을 몰라도 너무 몰랐구나 하는 생각을 참 많이 했다. 우리 반 반장이 '나는 방학이 너무 싫다'라고 하길래 방학이면 좋아야 하는 게 아니냐고 의아해했더니, '집에서 담배 농사를 짓는데, 여름이면 비닐하우스 안에서 담배 손질을 하는데 너무 힘들다. 차라리 학교에 오는 게 더 좋다'라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그 학생은 군인이 되어 아직 근무하고 있다.
호두나 잣이 딱딱한 채로 나무에 달려 있는 줄 알았고, 밤꽃 냄새를 처음 맡아 밀가루 냄새가 난다고 말하기도 했으며, 태풍에 벼가 쓰러져 벼를 일으키는 봉사활동을 나갔다가 거머리에 처음 물려 혼이 난 기억도 있다. 그때 학교별 학생들의 성적을 비교하기 위해 시험을 봤는데, 나이 많으신 한문 선생님이 학생들 성적을 올리기 위해 점수가 낮으면 '○ 푸는 벌'을 주겠다고 했다. 정말로 '○'을 화단에 거름으로 주었더니 꽃 한 송이가 사람 얼굴만 하게 커졌던 걸 본 기억이 있다. 아! 또 있다. 특이한 것으로 잔디 씨앗을 편지 봉투로 모았던 기억이 있다. 잔디 씨앗 가격이 비싸서 모았는지, 어떻게 쓰기 위해서였는지는 기억에 없다.
그 당시에는 시험문제를 낼 때 기름종이에 철필로 글씨를 쓰고 그 기름종이에 먹물을 묻혀 종이에 등사를 했다. 성적도 주산, 계산기 혹은 암산으로 했고, 성적을 낼 때 가로 세로 합계를 열심히 맞추던 기억이 난다. 생활기록부 성적표 등도 모두 직접 손으로... 하지만 컴퓨터로 할 때보다 덜 바빴다는 생각이 든다.(여유가 있었다고...)
나는 엄마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일부러 충남으로 내려갔다. 서울은 붙을 자신이 없고, 경기도 시험을 보면 집에서 출퇴근해야 해서... 처음에 자취할 때는 김치도 담그고 밥도 꼬박꼬박 해 먹고 열심히 살림을 하다가 나중에는 밥해먹기 싫어서 대충 먹고, 사 먹기도 하고, 그러다가 엄마가 해 주는 밥을 먹으려고 되도록 토요일이면 집에 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때는 일직 제도(일요일에 학교를 지키기 위해)가 있었다. 방학이나 일요일에는 모든 선생님들이 공평하게 돌아가면서 학교를 지켜야 했다. 일직이 걸리는 날은 토요일에 집에 갔다가 일요일 새벽에 비둘기호(새벽 4-5시?)를 타고 일직을 하러 내려왔다. 기차를 타고 다니는 서울 나들이는 그 나름 낭만이 있었다. 비둘기호는 역마다 다 서기 때문에 좀 느리긴 했지만 사람들이 부대끼는 모습이 좋았고, 그때만 해도 굉장히 좋은 무궁화호(?)는 여름이면 너무 시원하고, 겨울이면 너무 더워서 기차를 내리고도 한참이나 더위나 추위를 못 느낄 정도였다.
방학이 되면 집에 가져갈 선물을 사곤 했는데, 그때 당시 광천 김이 좋다고 하기에 학부형 소개로 한 톳에 2만 원 정도(40년 전 가격)에 샀던 기억이 있다. 비싸다고 생각했는데 엄마가 맛있다고 너무 좋아하셔서 다행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광천 김이 좋은 줄 안다.
광천중학교는 1946년 개교(78년의 역사)를 했고, 2016년에 광천여중과 통합을 해서 새롭게 건물을 올렸다고 한다. 지금은 모두 최신식 시설이었고 운동부를 육성한다고 기숙사도 있어 너무 달라져 있었다. 다만 학교 정문까지 도로가 잘 나 있었지만 밭둑길로 난 샛길이 있어 그 길로 가다 보니 옛날 생각이 났다. 비가 오면 장화를 준비해 신어야만 했던 기억이...
학교와 읍사무소, 도서관 등은 모두 신식 건물로 바뀌었는데 내가 자취하던 곳을 찾았더니 거기는 옛 건물 그대로 남아있고, 사람이 살지 않는지 문이 잠겨 있었다. 이곳만 빼곤 그래도 광천을 찾아 광천중학교 시절을 되돌아보고 돌아오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첫 직장, 첫 학생, 모든 게 처음이라 어설프고 힘들었던 시절이지만 그래도 좋은 기억이 더 많았고, 좋은 추억이 더 많았다. 34년 교직을 계속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아니었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