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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서희 Dec 15. 2022

바나나와 하얀 수건, 그러나 조선 시대

- 2017년 길 위의 인문학 수업 중...

바나나와 하얀 수건, 그러나 조선 시대

- 2017년 길 위의 인문학 수업 중...


글 서서희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꼭 바나나가 생각난다. 어릴 적 병원에서 나오면 엄마는 항상 바나나를 사 주셨다. 나는 엄마가 바나나를 사 주셨다고 기억하는데, 나중에 엄마가 하시는 말씀은 내가 병원만 나오면 항상 바나나를 사 달라고 졸랐다고 한다. 지금이야 바나나가 값이 싼 수입과일이지만 어린 시절 바나나는 정말 귀하고 비싼 물건이었다.

   우리 엄마는 자식에게 ‘바나나’를 아끼지 않으셨다.

   엄마는 팔공주 중 셋째 딸이고, 팔공주 중 유일하게 고등학교를 졸업하셨다. 그 당시에 여자가 배운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어서 거기에 대한 자부심도 대단하시다. 아버지가 다른 여자를 만나자 엄마는 친정으로 가서 결단을 내리셨다. 아버지 도움을 받지 않고 혼자서 두 자식을 기르겠다고. 간호원 생활도 하고, 조산원도 하고. 나중에는 아동병원에서 정박아 아이들을 돌보다 건강을 많이 해치기도 했다.

   그 당시 여자 혼자서 두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지금과는 많이 달랐다. 남들의 시선도 곱지 않고, 가난에서 벗어나기도 힘들었다. 팔공주를 키워낸 엄마의 외가에 기댈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나는 참 많은 것을 누렸다. 여름이면 피서를 간다고 한강에 데리고 가서 수영을 하면서 먹고 놀았다. 조금 커서는 계곡에 가서 수박을 먹으면서 놀았다. 겨울에 오빠와 나는 스케이트를 탔다. 오빠는 롱 스케이트, 나는 피겨 스케이트. 논에서도 탔고, 스케이트장도 갔다. 날 좋을 때는 배드민턴도 쳤다. 배드민턴 채도 사 주셨다. 초등학교 3학년 삼척에서 살던 시절은 동해안 해수욕장에서 조개도 커다란 그릇에 하나 가득 잡고, 수영복 입고 즐겁게 놀던 기억도 있고 사진도 있다.

   어려웠지만 나는 ‘바나나’를 먹고 자랐다. 남들이 하는 것은 다 하면서 컸다. 교육열도 남달랐다. 오빠는 중학교 입시를 위해 초등학교 때 과외도 했고, 나는 학교 다니면서 수업료를 밀려본 적이 없다. 학교에서 필요한 돈은 꼭 1순위로 준비를 해 주셨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여자 혼자서 자식을 둘 다 대학까지 시키셨을까? 참 대단한 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오늘의 내가 있지 않았을까? 참 감사할 뿐이다. 그래서 시어머님과 똑같이 엄마에게도 잘하려고 나는 노력한다.


   엄마 하면 또 떠오르는 것이 ‘하얀 수건’이다.

   엄마는 간호원 생활을 오래 하셔서 청결에 대해 좀 남다르게 생각한다. 수건이든 걸레든 꼭 하얗게 삶아야 한다. 지저분한 것을 못 보신다. 남의 집에 가면 수건과 걸레가 구별이 가는데, 우리 집은 수건과 걸레가 구분이 안 갔다. 둘 다 하얗고 깨끗하다. 수건과 걸레와 행주가 항상 깨끗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거기에 대해 잔소리도 심하시다. 남에 대해서도 그렇다. 나만 깨끗하면 되는데, 남까지 깨끗하길 원하신다. 내가 결혼하고, 시어머님이 빨래를 쌓아놓지 못하셔서 하루에도 여러 번 세탁기를 돌리면서도 빨래를 삶지 않는 것을 보시고는 흉을 보시곤 하셨다. 나도 시어머님 눈치를 보면서 빨래를 삶다가 이제는 나도 손을 놓았다. “어머님 돌아가시면 빨래 삶는 기능이 있다는 드럼 세탁기를 써야지.”하고 마음을 먹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당당하게 사셨던 분임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조선 시대’이시다. 대등한 인간이 아닌 남자에게 매인 ‘여자’의 삶을 사신 분. 팔공주 중 셋째 딸인 엄마는 아들이 몹시 귀하다고 아셨고, 아들인 오빠를 위해 온 정성을 다하셨다. 아들 하나 잘 키우면 여생이 편해지실 거라고 믿으셨다. 딸인 나는 덤이었다. 오빠를 ‘마마보이’로 키우신 것 같다. 오빠와 난 둘 다 엄마 말에 절대복종이었다. 한 번도 거슬러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런데 그렇게 잘 키운 자식에 대한 자부심이 너무 커서 며느리와 사이가 안 좋으셨다. 새언니는 두 번을 잘해보겠다고 들어왔다가 두 번 다 분가를 하고 결국은 오빠와도 헤어졌다. 그 이면에는 혼자 몸으로 두 자식을 대학까지 가르쳤다는 엄마의 ‘자부심’과 고등학교만 나온 것에 대한 새언니의 ‘자격지심’의 대결이랄까? 당신은 평생 열심히 사셨고, 열심히 산 사람에 대해 하늘에서는 당연히 보답해줘야 한다고 굳게 믿었었기에 지금 치매에 걸리신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세상살이가 너무 허무해져서.

   며느리 입장인 나는 엄마 입장도 이해하고, 새언니 입장도 이해를 한다. 우리 윗세대에서는 엄마가 시어머니로서 당연히 누려야 했을 일들을 엄마는 새언니에게 요구했을 것이고, 새언니는 세태가 바뀌었으니 그런 요구를 하는 시어머니가 이해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사이에 낀 오빠. 부모 말과 부인 말을 잘 듣고, 열심히 돈을 벌어다 주었지만 옛날에 잘 번 것은 소용이 없고, 지금 경제적으로 부족하다고 대접받지 못하는 ‘한국 남자들’중 하나. 엄마도, 오빠도, 새언니도 모두 잘못 살아온 사람들이 아니라 불쌍한 사람들일 뿐이다.


   세상이 너무 빠르다. 세상이 너무 빨리 바뀌다 보니, 바뀐 것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은 낙오되고야 만다. 낙오되지 않고 산다 해도 나는 과연 내 자식 세대와 문제가 없을지 지금부터 심히 걱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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