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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쏴재 Sep 01. 2022

약자의 대화법

지위 게임

나는 왜 가족과 연인과 친구와 대화가 잘 되지 않을까?

권위가 높은 사람이 나의 말을 잘 들어주면 왜 그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처럼 보이는가?


대화가 안 된다는 것은 타인과 공감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이런 경우가 빈번하게 일어나는데, 한편 간단하게 무조건 들어주기만 해도 말하는 화자는 공감이 되었다고 느낀다. 특히 권위가 있는 사람(지위와 능력이 있는 사람)이 들어주기만 해도 그 사람이 나를 잘 이해한다고 느낀다.

뭔가 분명 쉬운 방법이 있는 데 사용하기는 어려운 것이라고 느낌적인 느낌이 든다. 그래서 우리는 빈번하게 타인과 대화에서 공감을 얻지 못한다.


어떻게 해야 잘 공감하고 잘 대화할 수 있을까? 

답은 언제나 나에게 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고 체득한 부분을 정리해 봤다.


대화를 잘하기 위해서

1. 나의 위치를 낮춘다고 상상하면 상대방 말을 듣기가 쉬워진다. 그냥 들어주기만 하는 것은 지루하고 일방적이어서 말을 들을 때 이런 위치를 유지한 체 추임새를 넣거나 질문을 하면 효과적이다. 지루하지 않아서 대화에 계속 집중할 수 있다. 공을 던지는 사람이 있으면 받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위치를 낮추기만 하면 일방통행이다. 높이기만 해도 일방적이다. 대화가 주고받아야 하는 놀이인 줄 모르고 하나의 역할만 고집하는 경우에는 불만족스러운 관계가 되어버릴 수도 있다. 순서가 되었을 때 잘 치고 들어가야 하고 잘 받아주기도 해야 한다. 대화는 심리게임, 지위의 게임이다. 우리는 이미 이런 구조를 느끼고 체득하고 있다. 특히 대화를 잘하는 능력이 있는 사람은 이런 대화에서의 지위에 대한 감각을 이해하고 본능적으로 잘 활용하는 것 같다.

2.  우리는 자신을 상대적 약자에 투영은 경향이 있다. 이런 피해의식이 과하면 주고받는 게 어렵다. 대화 게임. 심리적 지위를 높이고 낮추는 게 어렵다.

약자라고 대화에서 지위를 낮추는 게 아니라 '억울하니깐 내 이야기를 들어줘'가 된다.


다시 하나하나 풀어서 보자

공감하기 위해서 왜 우리는 잘 들어야 하는가?

청자나 화자는 공감하기 위한 노력이 서로 다 같이 필요하지만 청자는 조금은 수월하게 공감의 한 단계를 뛰어넘을 수 있다. 공감의 과정은 화자가 수고로운 노력을 통하여 청자를 설득하는 과정과도 비슷하다. 말하는 사람은 이미 공감을 위한 목표나 목적을 가지고 있다. 대나무 숲에서 소리치거나 벽을 보고 말하는 것은 매우 일반적이 않으며 공감의 목적은 없다. 청자는 이 화자가 목적을 받아들이기만 공감이라는 성과를 획득할 수 있다. 비행기를 착륙시키는 것이 이륙시키는 것보다 힘이 적게 든다.

실제로 아무 조건 없이 들어주기만 해도 공감되었다고 느낀다. 맞장구를 치거나 치지 않아도 된다. 좋은 표정과 끄덕임만 있으면 된다. 공감중 절반은 성공한 셈이다.


한편 공감의 특성 중 하나로 우리는 자기 스스로를 상대적 약자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두 명이 싸우거나 화내는 것을 제3자로서 지켜볼 때 우리는 화자의 분노에 공감하기는 어렵다. 사건의 경중을 떠나서, 사건의 진실을 떠나서, 비판이나 화를 내는 사람의 기분에 공감하기보다 그 화를 받는 사람(피해자)에 쉽게 공감하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화내는 사람이 정당하더라도 그 대화 장면에서 우리는 약자에게 더 쉽게 공감한다. 

친구와 대화 중 황당한 일 때문에 또는 남자 친구 때문에 화가 난 일에 대해서 친구가 나에게 말하는 상황을 상상해 보자(모두 이런 경험을 해봤을 것이다). 이 상황에서 내가 친구에게 충분히 공감하지 못하고, 잘 들어주지 못하고, 친구의 말을 끊는 이유는 청자 우리 자신을 피해자 또는 약자로 상정하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말이 나를 공격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하고 대화 속의 남자 친구가 입은 피해에 공감하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이야기가 변명처럼 들리는 것은 상대방과 같은 행동으로 내가 피해를 입을 수도 있다고 상상하는 것이다. 내가 피해자가 될 수도 있다고 확장하여 추측하는 것이다. 

우리 자신은 언제나 약자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공격적인 말을 하거나 화를 내는 화자에게 공감하기 어려운 법이다. 청자나 제삼자는 화를 내는 사람의 억울한 기분에 공감하기보다는 화를 내는 사람은 비겁하다고 치부해버린다 또는 경솔하고 어리석은 자라고 판단해버린다.

이렇게 강력한 본능을 극복하고 상대방이 상처 입은 강아지라서 화를 내다고 상상하면 공감하기 쉬워진다. 내가 약자가 아니라 저런 이야기를 할 때는 상대방이 약자구나 상정하면 좀 더 들어주기 가 쉬워지고 공감하게 된다. 반대로 우리가 공감받기 위해서는 공격적이거나 화를 내지 않는 말투가 필요하다. 


스스로를 약자로 여기지 않는다면 청자가 개똥같이 말하더라도 찰떡같이 알아들을 확률이 조금 올라간다. 나는 대화중에 비판적 의견 반대의견을 자주 말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그런 태도의 근본적인 이유는 나의 결핍이라고 본다. 작은 웅덩이에 돌이 떨어지면 물이 크게 흔들리지만 바다에 돌 하나를 던지더라도 파도는 생기지 않는다. 내가 약자가 아니라 여유롭고 풍족하다면 화자의 말에 좀 더 공감할 수 있다.   

즉 잘 듣기 위해서는 자신을 상대적 약자라고 여겨선 안된다. 같은 맥락으로 상대방이 잘 말하기를 원한다면 상대방에게 여유를 주면 된다.


더하여 스스로를 약자로 여기지 않는 자세는 살아가는데 도움이 된다. 예를 들어 방안에 울고 있는 아이를 보면 우리는 어떻게 대할 것인가?  

방안에 울고 있는 아이를 보고 나도 억울해서, 슬퍼서 같이 울어버리는 상황은 좋지 않다. 어른으로서 어이를 잘 보듬어줘야 한다. 그 아이는 내 감정이기도 하고 타인이기도 하다.


나 스스로를 피해자 또는 약자로 두면 세상이 나에게 빚진 게 있다고 상정하는 것이다. 언제나 화가 나고 억울한 상태인 것이다. 상대방이 또는 주위 세상이 어떤 것을 주더라도 그것을 기회로 여길지 버려야 할 것인지 제대로 판단하기 어렵다.

자본주의에 불만이 있는가? 없어져야 될 악인가? 사민주의가 되면 좋은가?

비판보다 포용과 공감할 때 앞으로 나갈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선 나 자신을 약자로 대하지 않는 여유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대화할 때도 내 위치를 바꿀 수 있다. 정신승리일 수 있다. 정신승리가 최고의 승리다


연애에서도 이런 관계는 문제가 될 수 있다. 너는 왜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지 않니? 왜 나에게 사랑과 관심을 안 주니?

이런 약자/보호자 관계에서는 대화도 연애도 어렵다


약자의 피해의식에서 벗어날 때 대화에서 나의 지위를 올릴 수도 내릴 수도 있다. 지위를 내리면 관대함을 가지고 아이 같은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다. 내 지위를 낮추지 못하고, 상대방의 말을 판단하거나, 가르치려들거나, 추측한다면 상대방은 자신이 공감받았다고 느끼지 못한다.


지위를 낮춘다는 게 약자가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내가 지위를 낮추어 상대방의 말을 주고받을 때 나에게는 권위가 부여된다.

지위는 상대적인 것이다. 타인과 비교되었을 때 지위가 생기는 것이다. 상대방을 자리에 앉혀주고 나야 나도 앉을자리가 생긴다. 아니면 진흙탕에서 뒹굴 수밖에 없다

  

타인과 관계를 맺고 연애를 할 때 우리는 비슷한 사람을 찾곤 한다. 나랑 반대인 사람은 곁에 두고싶지어하지는 않는다. 스스로를 약자나 강자로 대하는 사람. 약자에 연민하지 않는 사람. 자본주의 게임에 빠져 착각하는 사람. 왜 살아야 하는지 모르고 왜 죽지 않는지 모르는 사람과의 대화는 즙겁지 않다. 


그래도 즐거운 것에서만 의미를 찾지는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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