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도민이 되다(10)

괘씸한 그녀

by 쏴재

그가 제주에 오기 한참 전 이야기다.


어릴 때부터 외국에 대한 동경이 컸지만 고등학교 시절 영어 성적이 형편없었다. 남들만큼 노력했다고 생각했지만, 수능 외국어 영역에서 5등급이라는 초라한 성적표를 받았다. 그러나 대학에 입학한 뒤 스스로 영어 말하기와 듣기를 연마하며 조금씩 성취를 쌓아갔다. 친구들 사이에서는 혼자 영어로 말하기 연습을 하는 독특한 사람으로 보였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대학교 근처의 외국인들이 자주 찾는 술집에서 술을 마시며 영어를 배웠다. 시행착오도 많았지만, 결국 외국인 여자 친구를 사귀게 되었다. 새로운 문화와 이국적인 외모에 매료되었고, 낯선 한국 생활에 짐을 덜어주겠다는 핑계로 시작된 연애였다. 이태원과 해방촌을 오가며 그녀와 시간을 보냈다. 당시 해방촌의 분위기는 지금과는 사뭇 달라 조금 무섭기도 했지만, 낯선 경험들로 가득 찬 그 시기는 나름대로 흥미진진했다.


이후 10여 년간 연애 상대는 대부분 서양인이었다. 그는 외국인 여자 친구를 자랑거리로 삼았고, 주변의 인정 속에서 얕은 자존심을 키웠다. "너는 자유분방해서 외국인과 더 잘 맞아"라는 말을 들으며 스스로도 그 말에 점점 설득되었다. 하지만 결국 모든 것이 착각임을 깨달았다.


영어 실력 덕분에 뉴욕에서 인턴십 기회를 잡았다. 교수님의 추천으로 출발한 뉴욕행은 정직원으로 전환될 가능성도 열려 있었다. 하지만 그 시기는 불안과 우울이 여전히 그를 짓눌렀던 시기였다. 20대 초반 겪었던 질풍노도의 시기를 겨우 지나온 그는 감정 조절이 여전히 서툴렀다.


뉴욕에서 향수병에 걸렸다. 동료 한국 여자인턴들은 일도 잘하고 즐겁게 지내는 것처럼 보였지만, 남자 인턴들은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시달렸다. 환상적인 도시 뉴욕은 그에게 기회가 아닌 외로움으로 다가왔다. 그느 떠나기 전 서울에서 짝사랑했던 여자가 더욱 그리웠다. 그녀를 잊지 못해 스스로를 더 애처롭게 여기며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평소 비호감이던 후배에게까지 핀잔을 들었다. "선배가 계약 기간보다 먼저 돌아가면 한국인들 평판이 나빠지지 않겠어요?" 그 말에 치욕감을 느꼈지만 반박할 말은 없었다.


뉴욕으로 떠나기 전 서울에서는 세 명의 룸메이트와 함께 살았다. 그중 한 명은 재미교포였고, 그의 룸메이트 친구는 프랑스 혼혈이었다. 긴 흑발에 깡마른 몸, 치명적일 만큼 독특한 분위기의 그녀는 주변 사람들에게 ‘얼음 공주’라 불렸다. 프랑스 특유의 냉소적이고 회의적인 유머를 구사하던 그녀는 자주 비관적인 이야기를 했고, 누구에게도 쉽게 마음을 열지 않았다.


'나는 누구도 사랑하지 않아. 나에겐 상처가 있어.'


다섯 살 연상이었던 그녀의 말은 지금 돌아보면 헛소리에 가까웠지만, 당시 그는 그녀에게 완전히 매료되었다. 부서질 것 같고 사라질 것 같은 그녀의 분위기에 빠져 헤어나올 수 없었다. 하지만 뉴욕으로 떠날 예정이었던 그는 결국 그녀와의 관계를 지속하지 못했다. 뉴욕에서의 향수병은 그녀를 그리워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 컸다.


하지만 뉴욕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오니 그녀는 그를 다시 만나주지않았다. <오페라의유령>에서 라올이 그녀를 사랑해 북극행을 포기하고나니 크리스틴은 돌연 약혼놀이를 중단해버린것처럼 말이다.


여러차례 낭만과 이별을 겪고 그는 한국 여자와의 연애가 더 좋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과학적으로는 부정확한 판단이지만 본능적으로 보면 정확한 판단이다. 같은 문화와 언어 속에서 서로의 감정에 공감하는 관계가 훨씬 깊고 안정적이었다. 이 깨달음은 시간이 지나며 더 확고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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