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그가 이직한 이유_01

원점

by 쏴재

새로운 시작을 앞둔 그의 마음은 설렘과 불안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으로 가득했다. 일상적인 출근길도, 가벼운 여행길도 아닌, 전혀 다른 삶을 향한 첫걸음이었다.


꼼꼼한 성격 탓일까, 여행 경험이 많아서일까. 짐을 싸는 그의 손길은 유독 신중했다. 미간에 주름을 그리며 하나하나 차에 실어 나르는 모습에서 긴장감이 묻어났다. 새로운 시작을 앞두고 차도 새 단장을 했다. 미뤄뒀던 정비를 마치고, 남쪽의 따가운 햇살을 막아줄 선팅까지.


'섬에서는 유류비가 리터당 100원씩이나 비싸다던데...' 불안한 마음이 그를 마트로 이끌었다. 아직 목포 숙소에도 도착하기 전, 토마토와 사과를 고르는 손길에는 조급한 마음이 담겼다. 과일들을 조수석에다 두고 안전벨트까지 매어주는 것으로 불안한 마음을 달랬다


잠 못 이루는 밤, 내일의 긴 여정을 핑계 삼아 치킨집을 찾아 나섰다. 한산한 동내에도 꽤나 여러 치킨집이 있었고 쉽게 고르지 못했다. 결론을 내리지 못한 그는 무작정 찾아 들어갔다.

서울에서는 볼 수 없을 정도로 저렴한 가격이었지만 그 맛은 적지 않았다. 그래도 충분하고도 만족할만한 기분이 드는 것은 아니었다. 한 잔의 맥주로는 그의 마음이 채워지진 않았다.

"사장님, 여기 소주 한 병이요!"

"참이슬로 드릴게요"

"아! 잎새주로 주세요"


이른 새벽, 아직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항구의 차가운 바닷바람이 그의 얼굴을 스쳐갔다. 물기가 잡히는듯한 겨울 공기였다. 달리는 발걸음은 평소보다 무거웠다. 1시간을 달리고 나서야 까만 하늘이 남색으로 바뀌었다. 어르신들의 모습이 간간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해가 노랗게 올라오고 나서 그의 차는 배에 슬금슬금 올라탔다. 공기 중의 수분도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세상에 나오고 40년의 시간이 흘러, 그의 발걸음은 남쪽 바다의 끝, 제주에 닿았다. 서울에서 뉴욕으로, 다시 호찌민과 하노이를 거쳐 서울로, 그리고 이제는 제주까지. 그의 여정은 마치 끝없는 바다처럼 깊고 넓었다.


어린 시절, 빨간 유선전화기는 그의 유일한 위안이자 슬픔의 매개체였다. 맞벌이 부모님 대신 형과 함께 남겨진 집에서, 어릴 적 그는 억울함이 차오를 때마다 전화기를 붙잡고 어머니를 찾았다. 엄마 목소리만 들어도 위로가 됐다. 하지만 "둘 다 잘못했다"는 대답은 그의 마음에 갈망을 주었다. 이해받지 못한다는 두려움과 인정받길 원하는 마음의 그림자는 그의 어린 시절부터 함께했다


물질적인 것보다는 마음의 이해를 갈구했던 아이. 장난감이나 옷을 사달라고 조르기보다는,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길 바랐던 아이였다. 11살, 할머니의 갑작스러운 이별은 그의 마음에 상처를 남겼다. 3일 동안 이어진 눈물은 마치 세상의 불공정함에 대한 항변 같았다.


그는 공정함에 집착했다. 옳고 그름의 경계를 명확히 하려 했고, 그 집착은 삶의 모든 영역으로 번져갔다. 업무에서도, 인간관계에서도 감정보다는 공정한 판단을 갈구했다. 패배를 알면서도 끝까지 자신의 억울함을 외치는 그의 모습은, 어쩌면 여전히 이해받기를 원하는 어린 시절의 그였을지도 모른다.


사랑도 그랬다. 넘치는 마음과 달리, 표현은 서툴렀다. 물 한 잔도 쉽게 부탁하지 못했고, 대신 스스로 완벽해지려 했다. "착한 아이여야 사랑받는다"는 믿음이 그의 사랑법을 규정지었다.


연인과도 다툴 때도 자신은 항상 안전지대에 있었다. 차갑고 방어적인 태도로 사랑을 했다. 그리고 타인에게는 그 자신의 온전한 모습 그대로 사랑받기를 원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