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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이직한 이유_02

2011

by 쏴재

대학생이던 그는 늘 새로운 것에 마음을 빼앗기며 언젠가 단단하고 뜨거운 무언가로 자신을 채울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어디로 가는지는 몰랐지만, 조급했다. 그렇게 매일 달려갔다.


영어를 배우겠다며 동네 외국인 술집을 드나들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타국에서 온 사람들을 만났다. 한국어를 가르쳐주기도 하고, 한국 생활에 대해 조언해주기도 했다. 언어는 단지 소통의 도구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었다. 낯선 문화와 외향적인 에너지에 매료되었고, 한국 생활이 낯선 이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위치에 자신을 두며 그는 어딘가 안전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사랑 앞에서는 차갑고 방어적이었다. 그러면서도 무리하게 자신 그대로를 사랑받고 싶어 했다.


방이었다. 그가 교포 친구와 프랑스계 혼혈인 여자와 함께 살게 된 것은. 뉴욕으로 떠나기 3개월 전이었다. 긴 흑발의 마른 여자는 '얼음 공주'라고 불렸다. 그녀의 말에는 항상 프랑스식 냉소가 묻어났다. 세상을 향한 회의와 비관이 그녀의 목소리를 더욱 차갑게 만들었다.


그는 그녀에게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마음을 빼앗겼다. 그녀를 사랑하게 된 순간조차 그 자신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 부서질 것 같고, 어느 순간 사라져 버릴 것 같은 그녀의 공기. 그는 점점 더 깊이 빠져들었다. 고백하고 싶었지만, 그녀가 내놓을 대답이 두려웠다. 거절의 말이 아니라, 그보다 더 차갑고도 건조한 무언가가 있을 것만 같았다.


그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조용히, 아무도 모르게. 그녀의 창백한 얼굴과 깊은 눈동자가 그를 사로잡았다. 마치 유리 세공품처럼 섬세하고 아름다웠지만, 한순간에 산산조각 날 것만 같았다. 그는 그녀에 대한 마음을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의 차가운 미소 앞에서는 한 마디도 꺼낼 수 없었다.


마지막 한 달, 그들은 거의 같이 지냈다. 가깝고도 먼 거리였다. 그녀의 비밀스러운 슬픔이 무엇인지 알 것도 같았지만, 결국 알지 못했다. 뉴욕행을 핑계 삼아 그는 끝내 고백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것이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녀는 그저 상처 입은 어린 소녀였을 뿐이다. 하지만 그는 그녀가 작은 관심이라도 보여줄 때마다 감사해했다. 마치 엘프가 준 선물이라도 된 것처럼.


한국에 돌아왔을 때 그녀는 그를 만나주지 않았다. <오페라의 유령>에서 라울이 크리스틴을 위해 북극행을 포기했더니, 그녀가 갑자기 약혼 놀이를 그만둬버린 것처럼. 그렇게 그들의 이야기는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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