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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산과 그녀

산과 그녀

(2)

by 쏴재

"나는 운이 좋았지." 할머니는 그렇게 마음을 삭히곤 했는데, 그 말을 할 때마다 창밖으로 보이는 산자락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 속에는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오히려 더 큰 슬픔이 되어버린 시간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으며, 할머니의 주름진 손가락은 마치 그때의 기억을 더듬듯 허공을 천천히 움직였다. 그 시절, 끼니를 건너뛰는 날이 많았지만 산에서 만난 할아버지 덕분에 조금은 덜 무서웠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평생을 나무꾼으로 살면서 새벽부터 저녁까지, 때로는 달빛을 길잡이 삼아 산을 오르내리셨다.


"다들 물가로 도망쳤을 때, 바다에 구원의 배가 온다는 말만 믿고 사람들이 물결처럼 밀려갈 때, 우리는 홀로 산으로 향했지." 할머니의 목소리가 잠시 멈추었다가 이어졌다. "그때 산이 나를 품어주었어, 마치 어미가 새끼를 감싸 안듯이 나무와 나무 사이로, 바위틈으로 숨겨주었던 거야."

"나만 운이 좋았던 건지... 나만 품어줬어"

할아버지와 이웃들은 마치 지독한 안갯속으로 사라져 갔으며, 어떤 이는 불현듯 들려온 총소리와 함께, 또 어떤 이는 구원을 찾아 바다로 향하는 길 위에서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밤이면 산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어, 바람 소리인지 귀신 소리인지 울음소리인지 분간할 수 없어. 안갯속으로 사라진 사람들이 날 부는 소리 같아. 왜 너만 살아남았냐고" 할머니는 마치 그때처럼 무언가를 꼭 껴안는 듯한 몸짓을 했다.


"살아있다는 게 죄스러울 때가 많았어, 하지만 네 아버지가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지." 할머니의 눈가가 붉어지며 목소리가 떨렸다. "아기 우는 소리가 산을 울릴까 봐, 젖도 나오지 않는 가슴을 비비다가 결국 손수건을 적셔서 물려주곤 했단다."


남편을 잃은 상실감과 고독은 그녀를 천천히 갉아먹었다. 끼니를 굶어가며 아이들을 키웠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아버지는 결국 산장지기가 되었다."내가 글을 알았으면... 글만 알았어도..." 한숨 섞인 그녀의 말에는 한이 담겨 있었다. 교육받지 못한 설움이, 가난한 삶이, 혹독한 운명이 모두 그 한숨 속에 있었다. 할머니의 그 한숨은 아버지의 가슴 깊이 새겨졌다


아기는 아버지가 되었고 그는 딸의 손을 잡고 동네 뒷산을 자주 올랐다. 발자국은 계절마다 다른 소리를 냈다. 봄에는 부드러운 흙을 밟는 소리, 여름에는 풀잎 사이를 지나는 소리, 가을에는 마른 낙엽을 밟는 소리, 겨울에는 눈 밟는 소리. 그 소리들은 지금도 그녀의 기억 속에 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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