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저기 보이는 건 소나무야." 아버지가 걸음을 멈추고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나무 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아버지의 손끝을 따라 흘렀다. "들리지? 저건 박새 소리란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나뭇가지 사이를 올려다보았다. 작은 새 한 마리가 쨍쨍거리며 노래하고 있었다.
"왜 저렇게 노래해요?"
"아마도 친구들한테 자기가 여기 있다고 알리는 거겠지." 아버지의 목소리가 부드러웠다. "너도 네 목소리를 세상에 들려주렴."
그날 이후로 그녀는 새소리에 귀 기울이는 버릇이 생겼다. 아침이면 창가에 앉아 새들의 아침 인사를 듣곤 했다. 어떤 날은 그들의 노래를 따라 부르기도 했다. 아버지는 그런 소녀를 보며 미소 짓곤 했다.
눈 오는 날이면 그들은 특별한 의식을 치렀다. 그리고 그날은 너무 인상적이었다. 거실의 전등을 끄고, 바람소리 장작 타는 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춤을 추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큰 손이 소녀의 작은 손을 잡으면, 세상은 그들만의 무도회장이 되었다.
"아빠, 눈도 우리랑 같이 춤추는 것 같아요!"
먼지처럼 날리던 눈이 제법 커졌다. 창문과 지붕에 눈이 쌓이는 소리가 들렸다. 아버지는 나를 들어 올려 빙글빙글 돌렸다.
"그래, 오늘은 눈도 우리의 손님이구나."
딸의 생일이면 아버지는 꼭 케이크를 만드었다. 슈퍼에서 사 온 것보다 못생겼지만, 그 어떤 케이크보다 달콤했다. 딸기와 블루베리를 하나하나 올리시던 아버지의 손길이 아직도 생생하다. 초콜릿으로 이름을 쓸 때면, 마치 편지를 쓰듯 정성스러웠다.
"아빠, 너무 예뻐요"
"네가 좋아하니 다행이구나." 아버지가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의 손끝에서 밀가루 냄새가 났다.
"할머니에게 전화드려서 얼른 오라고 해야겠다. 손녀가 생일 케이크 먹고 싶어 한다고"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아버지는 나를 내려놓고 수화기를 들었다. 잠시 후 그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창밖의 눈보다도 더 하얗게.
"할머니가..." 아버지의 목소리가 떨렸다. "산에서..."
그날의 폭설은 할머니의 마지막 발자국마저 삼켜버렸다. 아버지는 마을 사람들이 말렸는데도 밤새도록 산을 헤매셨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차가운 소식뿐이었다.
이후 그녀는 겨울이면 할머니의 발자국을 찾았다. 눈 내린 산자락을 걸으며 바위틈 사이로 스며드는 바람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가 때로는 할머니의 말소리처럼 들렸다. 더 이상 산에서 들러오는 원망소리를 듣지 않아도 된다고. 그토록 그리워하던 할아버지를 만났다고. 산허리를 감싸 안은 구름이 때로는 할머니의 하얀 머리칼 같아 보였다. 그 구름 사이로 비치는 햇살은 마치 할아버지의 따뜻한 미소 같았다. 그때 산이 할머니만 품어주었지만 이젠 할아버지와 함께 바위틈으로 숨겨주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