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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이직한 이유_08

2019

by 쏴재

베트남의 전통 건축물들을 바라보다 보면, 한옥 지붕들이 떠오르곤 했다. 날렵하게 솟은 처마와 기와의 곡선이 마치 오래된 기억처럼 친숙했다. 동남아의 다른 건축물들과는 어딘가 달랐다. 특히 지붕의 모양새가 그러했다. 적도 가까이에서는 머리 위로 쏟아지는 태양을 피하기 위해 처마를 짧게 두었지만, 한국의 지붕들은 멀리서 비스듬히 들어오는 빛을 가리기 위해 긴 처마를 둘러야 했다.


그는 이곳에서 이렇게 오래 머물게 될 줄 몰랐다. 하지만 베트남의 거리를 걸을 때마다 그는 어떤 생동감을 느꼈다. 사람들의 눈빛에서, 시장의 활기에서, 공사장의 소음에서도 희망이 피어올랐다.

"여기가 IMF 이전의 한국 같아요."

오래 살아온 교민들의 말이 그의 귓가에 맴돌았다. 한국에서 느끼던 무력감과 정체된 듯한 답답함 대신, 이곳에서는 매일 새로운 가능성이 자라나는 것 같았다. 마치 아침 일찍 열리는 시장처럼, 하루하루가 새롭게 시작되는 기분이었다.


이곳에서의 삶이 익숙해질 무렵, 싱가포르 부동산 개발회사에서 보낸 3년여의 시간 끝에 한국 투자사로부터 이직 제안이 왔다. 좋은 조건과 함께 더 높은 곳으로 가는 길처럼 보였다. 교육을 위해 한국에서 몇 달을 보내야 한다는 것도, 또 다른 곳으로의 이동도 새로운 여행처럼 설렜다. 그녀와 잠시 떨어져 지내는 것쯤은 큰 일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새로운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들 사이에서 그는 늘 외로웠다. 누군가에게 기대면 상처받을 것을 알았기에, 차라리 혼자이고 싶었다. 마치 본능만으로 사는 짐승처럼, 흙과 먼지를 먹고 사는 벌레처럼, 오직 자신의 생존만을 생각했다. 그 대가로 그는 두둑한 월급과 아파트, 기사가 딸린 회사 차를 받았다.


깊어가는 밤, 창밖으로 도시의 불빛들이 반짝였다. 무엇이 잘못되어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어둠이 그녀도 걷어낼 수 없을 만큼 깊어져 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마치 오래된 우물 속으로 천천히 가라앉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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