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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쏴재 Jun 10. 2022

고려청자와 구제 벨트와 가면

친구가 주는 혜택

나에게 가까운 친구란 자주 보고 자주 카톡 하는 사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오래는 되었지만 지금은 심리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나에게 가깝지 않은 친구들과는 다르다. 그들이 덜 중요하다는 게 아니다 때로는 적당한 거리감이 좋다. 어렸을 때부터 만나 무심하게 또는 허물없이 지내던 친구들 중에서도 이제는 나이를 먹어 체면을 차리고 자주 못 봐 어색한 친구들도 있다. 하지만 이런 어색한 살얼음도 녹아버리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적당히 거리가 있는 친구는 구제 벨트나 다이어리가 아니라 마치 고려청자 같다. 고려청자는 분명 명품이고 좋은 것인데 집에 놓기엔 부담스럽고 깨질까 봐 걱정이 된다. 가끔씩 보면 좋다. 감탄을 자아낸다.


우리 모두 가족, 친구, 애인, 모든 타인으로부터 관심과 사랑받기를 원한다. 내가 바라는 애정이 누구로부터 오냐에 따라 각각 미묘하게 다르다. 가까운 친구와 조금은 원거리 친구에게 바라는 것도 다르고 가까운 친구들 중에서도 조금씩 다르다. 바라는 것에 따라 내 역할도 달라진다. 아니 나의 다른 캐릭터가 튀어나온다.

나에겐 가까우 친구 그룹이 둘이다. 이 그룹은 비슷하지만 다른 성질이 있다


오래되고도 가까운 친구들 중에 고등학교 동창이 3명이 있다. 이들과 만날 때 나타나는 가면은 실제 나와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장 오래된 가면이다. 그들에게 인정받으면 내 본연의 성질이 좋게 평가된 기분이 든다.


우리는 서로 대할 때 좀 더 넓게 보는듯하다. 기본 시작 값이 20대가 아닌 10대의 모습이기 때문에 좀 더 입체적인 모습으로 서로를 본다. 서로의 의견이 달라 서로 미친 듯이 물어뜯고 싸우는 일도 적다. 서로의 모습에 또는 잘못 튀어나온 말에 마음 상할 일 도 적다. 좀 더 긍정적으로 봐서 그런 게 아니다. 10대 때 형편없던 모습을 다 봤기에 실망의 역치가 높다. 웬만해서는 실망하지 않는다. 지금은 어른이지만 여전히 그 모습이 반영된다.


이 3명에게는 내가 준 각각의 역할이 있다. 책과 영화 이야기를 주로 담당하는 1명이 있고 낚시나 서핑 취미 생활을 담당하는 친구도 1명 있다. 나머지 한 명과는 여자를 꼬실 때 함께 다녔다. 확연히 내가 바라는 그 친구의 역할 있는 것 같다. 이 3명과는 같이 있어도 즐겁지만 각각 1대 1로 만나도 즐겁다. 다른 그룹의 친구들과 비교해볼 때 유독 이 친구들과의 1대 1이 편하다. 


 마음의 소리를 공유하는데 거리낌이 없다. 언제 가장 화났는지 어떤  힘들일을 겪었는지 허물없이 대화한다. 나는 원체 말을 많이 하고 여러 그룹에서도 나의 감정이나 생각을 말하는 편이지만 타인의 감정을 들을 수 있는 경우는 이 친구들이 많이 제공한다. 다른 그룹의 친구들에게 내가 깊은 감정을 드러내면 당황하기도 하고 한다. 나는 감정을 숨기는 편이 아니라 화를 잘 내지 않거나 감정표현이 제한적인 분들과 만나면 답답한 기분이 든다.


깊고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많이 들으면 내가 그들에게 무언가가 된 느낌이다. 친구 이상의 지위를 수여받은 느낌이다. 더 많이 주고받는 것이 목적인 게임을 하는 게 아니다. 타인과 사회에 대한 나의 정의는 살아가면서 만들어진다. 이 친구들은 내가 생각하는 타인과 사회의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내가 그들과 좋은 관계를 가질수록 세상을 좋게 보는 듯하다


대학교 동기동창들 3명과 가깝게 지낸다. 만난 지도 벌써  20년이나 되었다.

3명 중 2명은 이미 결혼해서 아들 딸과 재밌게 산다. 그림을 그리다 여러 번 덧칠하다 보면 원래 그림이 어느 정도 덥혀버리듯 이들과 만날 때 형성되는 나의 가면의 성분 중에는 10대의 내가 빠져있다. 나에게 잘못된 행동이 있다면 그들 조금은 평가자의 시선으로 나를 볼 것이다. 어리석은 10대의 행동이 반영되었다고 점상 참작해 주는 게 적을듯하다. 어리석은 20살부터 관계를 맺었지만 조금은 서로를 어른으로 대하는 느낌이 살짝 있다.


직장과 취미생활을 보면 나와 가장 공통점이 많은 친구들이다. 그래서 비슷한 사회적 역할을 가진 친구들이다. 우리는 피할 수 없이 타인과 나를 비교를 하게 된다. 성공과 행복을 비교하며 나 스스로를 힘들게 할 때가 있었다. 그렇게 비교를 하는 준거집단이 지근거리의 대학동창들이 아니었다. 거리가 먼 고등학교 동창들이었다. 이들은 나랑 비슷한 삶을 살고 있어서인지 나에게 상대적 박탈감과 우월감을 주지 않는다. 어쩌면 그래서 그들이 더 좋은 친구들이라고 은연중에 느꼈는지 모른다. 지금은 고려청자 같은 고등학교 동창들보다 구제 벨트 같은 이들이 잘되는 게 더 행복하다. 나에게 관심과 애정을 주는 친구들은 오래된 친구들이 아니라 가까운 친구들이다


10대 때 나는 상당히 사회화가 덜되었고 모난 성격이었다. 주위에서 골고루 사랑받을 만한 성격이 아니었는데 관심은 받고 싶어 했다. 이 친구들은 20대 이후 나의 사회 과정에 가장 큰 역할을 했다. 물리적으로 심리적으로 아주 근거리에서 나룰 비춘 친구들이다. 그 거울에 미친 나의 모습 또는 그들을 모습을 통해 나는 좀 더 성장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그들은 나의 길이 그들의 길과 얼마나 다른지 보여주는 비교의 기준이다.


위 그룹의 친구들이 나의 정서적인 감정적인 부분을 주로 공감해주며 아래 그룹의 친구들은 좀 더 현실적인 활동이나 생계를 위한 활동에 따른 나의 감정에 공감을 해준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역할에 따라 다른 가면들이 써진다.  가면이 나라고 착각하기도 쉽다. 그래서 타인 판단하는 내 가면이 깨지거나 상처받으면 그 고통이 나에게 고스란히 전달된다. 하지만 그 가면은 내가 아니다. 나의 본질은 나만이 정의하고 판단할 수 있다.  


때로는 타인뿐만 아니라 내 가면이 나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헤르만 헤세가 말했다. 곁에 두기 위해 꽃을 꺾은 사람은 인생의 기쁨에 한 발짝 다가간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가면을 선택하는 게 행복에 한발 더 다가서는 적극적인 행동이라 할 수 있다. 좋은 친구는 3가지 혜택을 준다. 

 1. 좋은 타인이라서 같이 있으면 행복하다. 

2. 좋은 사회적 기준을 제시해준다.

3. 내가 생각하는 여러 가지의 나(가면) 중에서 좋은걸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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