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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쏴재 Jul 27. 2022

환경보호 자세

기후위기 대응

<환경 보호>를 실천하고 타인에게도 동기 부여하는 자세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 하나 있다.


기후위기를 걱정하고 환경보호를 실천하는 우리들은 이렇게 외친다 “현생의 문제보다 기후 위기는 더 큰 문제이고 반드시 바꿔야만 한다.” 현실의 각박함을 이해하는 듯 하지만 현실에 상황이나 행동에 비판적인 뉘앙스를 풍긴다. 환경보호를 위한, 기후변화를 막기 위한 행동의 목소리에서 나는 이러한 뉘앙스를 자주 발견한다. 내가 우려하는 것이 바로 이 태도이다. 이런 비판적 목소리는 듣는 이로 하여금 거부감을 불러일으킨다. 사건의 경중을 떠나서, 사건의 진실을 떠나서 타인이 화내는 것을 보면 그 분노의 감정에 공감하기는 참 어렵다. 비판이나 화를 내는 사람의 기분에 공감하기보다는 그 화를 받는 사람에 쉽게 공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청자는 화를 내는 사람의 억울한 기분에 공감하기보다는 화를 내는 사람은 비겁하고 나약하다고 치부해버린다 또는 경솔하고 어리석은 자라고 판단해버린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 눈앞에 있는 문제를 해결하고 불안을 대처하기에 하다. 주식에 투자하기보다는 신용카드 대금을 지불하는 게 먼저다 보니 어느덧 마이너스 통장에 지불해야 할 돈이 쌓인 것에 깜짝 놀란다. 현실 문의 금리가 높은지 환경문의 금리가 높은지 정확히 알 수도 없다. 내 걱정의 가중치는 상황에 따라 달라지지만 중요한 건 일단 둘 다 ‘불안’하다는 것과 ‘걱정’한다는 것이다. 어느 쪽의 금리가 높은 지도 알 수 없지만 걱정의 이자가 쌓이다 보면 내 마음은 파산할 수도 있다. 현생의 문제도 환경문제도 나에게 생사의 위기이다.

현생이 어려우면 빨리 피로해진다. 현생에서 먹고살기 힘들면 환경보호 생각이 들겠는가?

더 큰 걱정으로 지금의 걱정을 대체하는 것 밖에 더 되겠는가? 언 발에 오줌 누기 식, 아랫돌 빼서 윗돌을 괴기 식이다. 환경보호를 위해 현생의 문제부터 우선 해결하자는 은 아니다. 현생에 처한 문제들 또한 해결하기 쉽지 않은 문제이다. 

그렇다면 환경 보호를 외치는 사람들은 어떤 자세로 대중을 설득시켜야 하며 우리는 환경 보호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 걸까?


그 태도는 ‘공감'이라 생각한다. 환경보호에 대한 태도나 현생 보호에 대한 태도도 공감의 자세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현생을 잘 살려면 타인에게 공감하는 것이 중요하다. 타인에게 공감하는 것이 내 불안과 걱정을 줄이는데 도움이 된다. 환경보호를 한다고 나에게 직접적인 이득이 생기진 않지만 환경보호를 하는 것은 타인(다음 세대)에 공감하는 것으로 이를 통하여 나에게 만족감과 행복을 준다. 즐거움이든 슬픔이든 공감을 통하여 더 행복한 인생을 추구할 수 있다. 환경보호를 촉구하는 수많은 책이나 행동주의자들의 논리는 타인에 대한 공감으로부터 시작한다. 공감의 자세는 현생의 피로함을 줄여주며 우리가 환경보호를 지속하도록 도와준다. 환경보호를 통해 이런 태도는 가지는 것은 현생에 즉각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는 말이다.

'나는 타인의 슬픔과 괴로움에 많이 공감하지는 않지만 환경 보호는 하는 편이야’와 같은 자세는 성립하지 않는다. 식당 종업원에게 유독 짜증을 내는 행동 또는 자동차 운전을 할 때 타인에게 분노하는 행동으로부터는 환경보호(공감)의 자세를 찾을 수는 없다. 논리적이지 못하다.

환경, 사회, 또는 타인을 볼 때 '저건 어쩔 수 없어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야’라고 생각(비공감)한다면 환경으로부터 오는 스트레스가 끊임없이 나를 괴롭힌다. '저 친구는 왜 저럴까? 이해가 안 돼! 내가 참아야지, 앞으로는 그와 감정 교류를 최소화해야겠어' 이렇게 억누르는 행동을 한다면 결국 견디지 못하고 내 마음이 파산할 수도 있다.

'그럴 수도 있지. 그에겐 이게 최고 합리적인 행동일 것이야’라는 공감의 태도로 사회나 타인을 본다면 내가 받는 스트레스가 경감될 수 있다.


환경 보호를 실천하고 있는 우리가 실효적으로 환경보호를 하기 위해서는 더 크고 대중적인 공감이 필요하다. 공감 없는 비판이나 과학적인 결과만을 강조하는 것은 부작용이 있다. 환경운동을 논박의 소재로 끌어들인다. 다그쳐서는 공감을 얻기 힘들다. ‘너 잘못했어’라는 비판은 반감이 들게 한다.

아이를 대하는 마음으로 타인과 사회를 대하면 좋을 것 같다. 타인과의 관계, 환경에 대하여 아이들에게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우리는 이미 정답을 알고 있다. 아이에게 매너를 가르칠 때 타인이 어떻게 느낄지를 먼저 알려준다. 환경보호도 마찬가지로 타인이 불행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공감이 전제되지 않은 비판의 목소리만 공유되었을 때 환경보호 실천은 오히려 스트레스가 될 수도 있다. 내가 너와 다르다는 것을 꼬집어 내는 비판은 청자나 화자에게 모두 스트레스다. 서로에게 스트레스를 줄 수 있는 제로섬 게임에서는 승자와 패자가 없다. 패자와 패자가 될 수밖에 없다. 더 큰 공감과 실천을 필수로 하는 환경보호 운동의 방향으로 바람직하지 못하다.

수천 명의 주민이 수질을 개선을 위해 노력하더라도 단 한 명이 수질을 오염시키면 피해는 다 같이 받는다. 누구도 이런 행동을 못하게 법으로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범 국가적이고 세계적인 실천을 요구하는 운동에서 비판이 더 큰 공감을 얻어낼 거라는 기대를 할 수가 없다. 법 제정 이전에 공감이 우선이다.

아이를 양육하고 교육할 때 공감을 유도하는 방법을 활용하는 것과 같이 우리 환경보호 행동주의자들도 타인의 공감을 잘 유도할 수 있는 방법을 선택한다면 더 많은 이들과 함께 환경보호를 실천할 수 있지 않을까?


기후위기를 대처할 때 전 세계적인이 공감을 이끌어내는 게 우선이라고 본다. 그러기 위해서 현생의 문제와 환경문제를 각계각층에서 많이 다뤘으면 한다. 교육이나 철학이나 인문학적으로 현실의 불안(걱정)과 기후위기를 같이 논했으면 좋겠다. 무상 급식에 대해서는 찬반이 있는 정책이지만 고등학교 무상교육에 대해선는 한국의 대다수의 국민이 찬성하는 정책이다. 더 큰 공감을 이루어냈을떄 실행 또는 문제 해결이 등장한다. 법이나 정책이 수립된다.

채식은 확실히 기후위기를 대처하는데 도움이 된다. 예를 들어 채색을 강요하는 사회분위기는 별로지만 채색을 하고 있는 친구보고 '너 대단하구나!' '나도 못하는 실천을 하는구나'정도로 칭찬하거나 감탄하는 사회문화가 대중적으로 될 때 기후위기를 막을 수 있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한국에서는 여전히 채식하는 것이 힘들다. 잘 쳐주어야 '개인의 취향과 선택' 정도로 존중해준다. 환경 보호하는 운동에 대해서 한국의 대중은 어떻게 대하는가? '개인의 취향과 선택' 정도로 존중해준다.  


결론으로, 우리가 스스로 정답을 구하는 자세로 환경보호와 현생 보호를 실천하면 좋을 것 같다.

나 스스로에게 환경보호는 어떤 의미인가?


고민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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