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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혁 Jan 19. 2022

그날의 우리, 그리고 반지하

그날, 우리 집 반지하는 한순간에 암흑으로 변했다.

    지난 17년 7월 23일, 평소와는 달리 꿈을 꾸지 않았던 날이었다. 늦잠을 청하고 있던 나는, 어서 일어나보라는 어머니의 다급한 목소리에 잠에서 깼다. 휴대전화의 시계는 아마도 오전 8시를 조금 넘기고 있었고, 창문으로 고개를 돌리니 상당한 비가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게슴츠레 뜬 눈을 똑바로 뜨고 나서야 엄청난 폭우였음을 알아차렸다. 완벽히 잠기지 않았던 창문 틈새에서는 물이 조금씩 들이닥쳤는지, 이불이 축축했다. 그렇게 멀쩡해 보이는 하늘에 구멍이라도 생긴 듯 지긋지긋한 물벼락은 샐 수 없이 쏟아졌다.


    그때였다, 화장실에서 들리는 물소리. 문을 열어젖히니 변기 안 구멍에서 물이 치솟아 올랐고, 멈출 생각은 단 조금도 없어 보였다. 네모난 진보라색 바닥 타일은 정체 모를 오물에 가려져 점차 고유의 색을 잃어갔다. 그 순간 우리는 너무나 나약한 인간이었음을 깨달음과 동시에, 지하실에서나 볼 수 있을법한 음침한 분위기에 휩싸여 아무것도 하질 못 했다. 초조해 하며 넋 놓고 있다가 머릿속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것도 방법이라고, 화장실 문을 그냥 닫아버렸다. 헛웃음이 났다. 몇 분이 지났을까, 좁은 화장실 문틈으로 물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고, 그 물은 막무가내로 방 안에 퍼져나갔다. 곧 지직거리는 소음과 함께 집안의 모든 불이 꺼졌다. 어쩌면 사람 사는 곳이 맞나 싶을 정도의 어둠이 우리를 감싸 쥐었다. 빌라 1층에서 계단 3칸을 내려가면 보이는 반지하였던 우리 집, 현관문을 열면 바깥에 고여 있는 감당하지 못할 물이 그대로 들어오는 막막한 상황이었다. 살기 위해선 어쩔 수 없이 손잡이를 돌려야 했다. 하지만 반대편에서 밀어대는 물살에, 손잡이를 잡고 있었던 어머니는 몸을 뒤로 휘청거렸다. 문조차 쉽사리 열리지 않아 몇 분을 낑낑댔고, 결국 우리는 그 물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얼마가 지났을까, 어두컴컴한 공간에 이웃 아주머니가 들어와 이렇게 넋 놓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했다. 그 말과 동시에, 조금은 정신을 차렸던 것일까. 우리는 전자제품에 연결된 콘센트를 뽑았고, 바닥에 내려진 물체 중 당장 들 수 있는 것들은 물에 젖지 않도록 소파나 침대 위에 어서 올려놓았다. 그분은 나에게 걸레 같은 거라도 가져다 화장실 변기 안 구멍을 막고 있어 달라고 당부했다. 나는 그제야 빨래걸이에 걸려있던 두툼한 수건 몇 장을 손에 집어 들어 화장실로 향했고, 변기 안 구멍에 손을 갖다 넣었다. 모든 상황이 낯설었다. 투명하지 못한 그 물이 얼굴로 튀어 오를 때, 나의 기분은 참 고스란히도 죽었다. 아무리 물이 나오지 못하도록 힘을 주고 있어도, 상당한 수압을 막기에는 힘에 부쳐 역부족이었다. 몇십 분이 지나도록 물과의 전쟁은 계속되었다. 이제 막 중학생이었던 동생은 흥건해져 버린 바닥의 물을 피해 의자 위로 올라가 주저앉았고, 곧 서글프게 울기 시작했다. 동생에게 건넸던 괜찮을 거라는 나의 의미 없는 위로는, 차오르고 있는 물소리에 고이 파묻혔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사정을 설명한 뒤 최대한 빨리 집으로 와 달라 했다. 1시간 채 지나지 않아 도착한 아버지는,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잠자리에 들었던 집이 물바다로 난장판이 된 모습을 바라보며 울다 지친 동생을 끌어안았다. 나는 그 모습을 끝까지 보지 못한 채 고개를 돌려버렸고. 아버지는 바지만 겨우 걷고선 쓰레받기와 빗자루를 가져다 방 안에 고인 물을 양동이에 퍼 나르기 시작했다. 마침 화장실 변기 안 구멍에서 흘러넘치던 물도 점차 잦아들었다. 애써 웃어 보이는 아버지 옆에서, 나 또한 바지를 걷고는 물을 퍼냈다.


    물을 어느 정도 빼낸 후 밖을 나가보니, 동네 주민들이 침수로 인해 입은 피해를 공유하고 있었다. 그들은 인근 지하철역과 시내 도로, 그리고 자신의 집이 폭우로 인해 모두 침수되었다며 힘 빠진 목소리로 푸념했다. 맨홀 뚜껑 주변이 폭우로 인한 수압을 견디지 못해 파손되어있는 풍경은 지극히 비참했다. 지상에서 잠을 청하던 주민들은, 밖에 나와 무슨 일이라도 났나 하는 궁금한 표정으로 주위를 훑고선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잠옷에 슬리퍼 차림이었던 나는, 왜 그리도 초라한 기분이 들어 아무 말 못 하고 울먹였을까. 배가 고파 허탈한 상태로 고개를 돌렸고, 일정 시간 골목에 서 있던 사람들의 표정은 상당히 불안정해 보였다. 그렇게 물벼락이 안겨준 처참한 현장에서 동네 주민들을 처음 만나 뵈었고, 씁쓸한 눈인사를 한 채 집으로 돌아갔다. 집안은 여전히 초토화 상태였다. 암흑과도 같은 집은 어두워 잘 보이지 않았고, 영 다른 세상에 온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소식을 듣고 찾아오신 친할머니는 침수된 우리 집을 보며 별말씀이 없으셨다. 우리는 일단 물에 젖은 정도가 심해 버려야 할 물건을 한곳에 모아뒀다. 임시방편의 복구 작업은 꽤 시간이 흐른 저녁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축 처진 상태로 서랍에서 무언갈 집어 들었고, 그것들을 가방에 챙겨 집 밖을 나섰다. 어느새 쌀쌀해진 저녁 바람을 맞고 나서야, 우리가 함께 잠들었던 공간이 사라져버렸다는 게 실감 났다. 부모님은 인천에서의 일이 있어 집 근처로 숙소를 잡았고, 나와 동생은 친할머니댁에서 잠시 지내기로 했다.


    우리 가족이 편히 쉴 수 있을 만한 곳으로 이사하기 위해, 기존의 집을 부동산에 매물로 내놓고 잠시 머무를 생각이었던 반지하. 그 ‘잠시’는 내가 고등학생 1학년부터 졸업반인 3학년이 되던 해까지 계속되었다. 다니던 고등학교까지는 꽤 거리가 있었다. 그런데도 교통비를 아끼기 위해 다리가 아파도 악을 쓰며 빠른 걸음으로 1시간가량을 걸었다. 그렇게 죽기 살기로 도착하고 나면, 겨울날마저도 땀으로 흠뻑 젖어있는 나의 모습이 그렇게 초라해 보여 남모르게 고개를 숙이곤 했다. 결국에는 집이 팔렸다며 부동산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고, 우리는 새로운 집으로 이사할 생각에 들떠있었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우리가 잠시 머물렀던 반지하는 침수되었다.


    사건이 일어난 이후 언론에서는 인천에 시간당 110mm가 넘는 폭우가 내렸으며, 배수 시설이 역류하면서 곳곳에 침수로 인한 막대한 피해가 발생했다고 보도했다. 치매를 앓던 90세 노인은, 인천 남동구 구월동의 한 반지하 주택에서 집안에 차오르는 물을 피하지 못해 숨진 채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 기록적인 폭우는 우리들의 목숨을 앗아간 살인마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이런 비극적인 살인이 인천에서 일어나리라는 예측도, 예상도 하지 않았던 우리의 안일한 안전 불감증도 한몫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대처하질 못 하고, 그저 자연에 무방비로 당할 수밖에. 3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도, 집이 침수되었다는 증거를 남기려 촬영한 사진을 보니, 그 당시 느꼈던 절박함은 여전했다. 아직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은 그날, 동생이 바닥의 물을 피해 의자 위로 올라가 서럽게 울던 모습을 회상한다. 삶을 이어가던 곳이 한순간에 쓸모없는 곳으로 변해가는 장면을 지켜보며, 그 어렸던 동생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부모님 또한, 마음속으로 아무 죄 없는 무언을 탓하며 속으로 우셨을 것이다. 나 또한, 예전 기억을 상기시킨 조금 전까지도 대체 종잡을 수 없는 감정이 들어 수십 번을 죽었다 깨어났을 정도이니.


    그렇게 3년의 시간이 흘러 입대하게 되었고, 군 생활 도중 대암산 용늪 선점부대로 파견을 가 국방의 의무를 다했다. 하지만 이곳 역시 전례 없는 장맛비와 낙뢰를 동반한 폭우로 인해, 일부를 제외한 거의 모든 건물의 천장에서 물이 새어 보수작업에 들어가기 일쑤였다. 그렇기에, 공모전에 제출할 글을 쓰던 사이버 지식 정보 방의 연등은 당연히 불가능한 처지가 되었다. 그렇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짙은 어둠이 깔린 생활관, 작은 손전등 하나를 켜놓고 침대에 엎드려 천장에서 떨어지는 빗물 소리와 함께 글을 써 내려갔다. 예전이었더라면 저편 너머로 들리는 빗소리가 그렇게도 좋다며 차분한 마음으로 글을 썼겠지만, 그날 이후의 빗소리는 나에게 하나의 트라우마가 되었기에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장마에 태풍까지 북상... 최고 300∼500mm 물 폭탄’


    일과가 끝난 저녁, 핸드폰으로 한 뉴스 기사의 제목을 확인했다. 최악으로 치닫는 장마에 애꿏은 선한 사람들이 죽어나갈 생각, 그리고 더군다나 코로나 블루까지 군부대 안에서 극복해야하니 갑자기 이유모를 불안감이 엄습했다.


    “핸드폰을 잠시 불출할테니, 부모님에게 폭우로 인한 피해가 없는지 안부전화 드리고 혹시라도 피해가 있으면 보고하도록.”


    전화를 걸었다.


    “엄마, 그쪽도 비오죠?”

    “응, 인천도 지금 비 엄청 와서 나가지도 못해. 너 생활관에는 천장에서 물까지 샌다며, 괜찮은 거야?”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 그만 눈물을 흘렸다. 아직 아물지 못한 상처에, 또다른 상처가 찾아오니 치료를 해봤자다. 지금, 이 순간에도 문득 그날이 떠올라 뜬눈으로 밤을 지새울 반지하 주민들이 있다. 새로운 집으로 이사함으로써 다 잊힌 줄 알았지만, 그만 그날의 기억에 눈물이 나버리는 건 왜일까. 그날의 기억은 아픈 손가락으로 굳어져 버린 것일까. 그날을 선뜻 언급하기가 어려워 슬프지 않은 이야기로 대화의 주제를 바꿔버리는 나의 행동은, 아마 누구의 잘못도 아닐 것이다. 나로 인해 가족들이 그날 겪은 당혹스러움을 다시금 떠올리게 된다면, 괜한 머릿속을 헤집어놓는 게 아닐까 하는 죄책감의 나래에 빠져 끊임없이 회피하는 것일 뿐. 그 뒷감당은 오로지 나의 몫이기에, 꺼내려던 몇 마디를 조용히 묻어둘 예정이다. 이 글을 쓰는 순간까지 잊을 수 없었던 그날을 달래주려, 그만 따뜻한 잠자리에 들려 한다.


    마지막으로 이 글에서나마 전하고 싶다. 그날 다들 정말 고생 많았다고, 그날로 인해 먼저 세상을 떠난 사람들 모두 그곳에서는 안전하고 행복하게 지내시라고. 언젠간 그날을 입 밖으로 꺼내는 날이 찾아오면, 무턱대고 흐르는 눈물 잦아들 수 있도록 아무 말 없이 껴안아주는 사람이 내 앞에 서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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