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부터 아이가 한 친구의 이름을 자주 말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흘러가는 말로 들었다. “엄마 우리 반에 이서준 알지? 걔는 블록 부수는 걸 좋아해”처럼 가벼운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며칠 뒤 아이의 입에서 그 이름이 또 튀어나왔다. 이번에는 조금 묵직했다.
“이서준은 여자 아이들을 자꾸 쫓아다녀. 오지 말라고 해도 계속 따라와서 소리를 지른다니까?”
말을 전하는 아이의 표정이 여느 때와 다르지 않아서 그날도 대수롭지 않게 들었다. 하지만 서준이라는 이름은 외워둔 참이었다. 그로부터 사흘이 지난 어느 밤, 잠자리에 누운 아이가 한번 더 그 이름을 꺼냈다. 한껏 무거워진 이야기였다.
“나 이서진 진짜 싫어.”
“서진이가 왜 싫어?”
“자꾸 내가 만든 집을 부수고 도망가서 하지 말라고 했더니 내 어깨를 팍 때렸어. 그래서 나 유치원에서 울었어.”
순간 가슴에 달린 무게추 하나가 뚝 떨어졌다. 어깨를 맞고 울기까지 했다니? 숨을 가다듬고 꼬리질문을 한 끝에 알아낸 연유는 이랬다. 자유놀이 시간에 여자 친구들이 모여 블록으로 집을 지으면 서진이가 와서 부수고 도망가는 일이 반복됐다. 결국 아이는 화가 났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서진이가 아이를 밀치면서 둘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다. 이후 선생님의 중재로 서진이가 사과를 했지만 아이는 여전히 마음이 풀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쉽게 욱하는 성격이 아니건만 자식 일 앞에서는 평정심을 유지하기가 어렵다. 서진이도 고작 여섯 살 어린이인데 순식간에 그 아이를 원망하는 마음이 드는 것이다. 당장 선생님께 전화해 자초지종을 묻고도 싶다. 내가 이렇게 섣부른 분노를 하는 인간이었다니. 스스로에게 깜짝 놀랄 정도였다. 널뛰는 감정을 이성으로 짓누르며 우선 아이를 다독였다. 이번 일은 서진이가 잘못했지만, 친구와 어울리는 법을 잘 몰라서 그랬을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자고.
그날 이후 한동안 유치원 다녀온 아이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으나 다행히 별 일은 없는 듯 보였다. 서진이라는 이름을 다시 들은 건 그로부터 한 달쯤 지났을 때의 일이다. 집에서 블록을 가지고 놀던 아이가 불현듯 말을 시작했다.
“엄마! 이서진 말썽꾸러기인 줄 알았지? 사실 늑대였어.”
“응? 그게 무슨 말이야?”
“서진이가 매일 블록 집을 부수잖아. 그래서 내가 늑대같다고 하니까 엄청 좋아하더라. 앞으로는 이서진이 늑대하기로 했어. 나랑 이슬이가 집을 다 만든 다음에 “늑대가 오지는 않겠지?”라고 말하면 이서진이 와서 집을 막 부숴 버려! 그럼 나랑 이슬이랑 소리 지르면서 도망가. 진짜 재미있겠지? 나는 걔가 나쁜 친구인 줄 알았는데 사실 늑대였던 거야.”
와! 아이의 기지에 소리내어 감탄했다. 어른인 내가 한 일이라고는 고작 유치원에 전화를 할까말까 애태운 것뿐인데… 씩씩대며 핸드폰만 바라본 지난 며칠이 스쳐지나간다. 아휴…부끄러워서 얼굴에 열이 오른다. 서진이는 여자 친구들과 어울리는 데 서툰 친구다. 그럼 어떻게 해야 사이좋게 놀 수 있을까? 너는 집을 잘 부수니까 늑대를 해. 네가 집을 망가뜨리면 우리는 도망갈게. 이 무해한 논리로 아이는 좋은 친구를 얻었고 놀이는 더 재미있어졌다. 만약 내가 선생님께 전화해서 중재를 요청했다면 아이에게 늑대 친구가 생기는 멋진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관계에도 경험이 필요하다.
돌이켜보면 나도 어릴 적 혼자 간 놀이터에서 위험천만한 세상에 살아남는 법을 다 배웠다. 미끄럼틀을 거꾸로 오르다가 내려오는 친구와 부딪혀 이마에 멍이 들고, 그네를 한 발로 서서 타려다가 흙바닥에 엉덩방아를 찧고 울어본 뒤에야 ‘금지’라고 쓰인 모든 행동을 삼가는 어린이가 되었으니 말이다.
새로운 친구를 사귀고, 지금의 친구를 잘 지키는 방법도 놀이터가 알려준 기술이다. 그 시절 놀이터 멤버는 스펙트럼이 아주 넓었다. 코흘리개도 있었고 새침데기도 있었다. 간혹 긴 나뭇가지를 들고 흔들며 주변에 겁을 주는 아이도 있었지만 그러면 놀이에 끼워주지 않으니 어느 순간 기세가 사그라들곤 했다.
아이들이 얼추 모이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엎~어라 젖혀라~”를 외쳤다. 편이 나뉘면 곧바로 잡기 놀이가 시작됐다. 놀다보면 매일 사소한 소동이 일었다. 넘어져서 무릎에 피가 철철 나면 집으로 뛰어들어가 밴드를 붙이고 다시 나오고, 잡히기 싫어서 술래의 팔을 힘껏 뿌리치다가 싸움이 나고, 그 바람에 울고 삐지고 화해했던 수많은 날들.
하지만 나쁜 기억은 없고 더 놀고 싶어서 발을 동동 구르던 기억만 잔뜩 남아있다. 우리 편에 도움이 되려고 이를 악물고 달렸던 일, 잠자리에 누워 ‘내일은 미끄럼틀 틈새로 뛰어서 술래를 피어야지’ 생각했던 일, 다음 날 그대로 실천해서 최후의 1인이 되었던 일, 내기에 져서 토라진 친구의 마음을 풀어주려고 엄마 몰래 냉장고에서 사과를 가져다 주었던 일 같은 것만 생생히 떠오른다. 그러면서 눈치가 생겼다. 각기 다른 모양의 친구와 노는 법, 섭섭한 마음을 달래는 법, 승리를 얄밉게 기뻐하지 않고 패배를 깨끗이 받아들이는 법을 배웠다.
오래 전 놀이운동가 편해문 씨를 인터뷰하며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아이들은 작게 자주 다쳐야 크게 안 다칩니다.” 정글짐을 오르다가 떨어져 본 아이는 위험한 높이를 몸으로 가늠할 수 있다.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미끄럼틀을 거꾸로 오르는 친구를 잡다가 친구의 바지가 벗겨졌다면? 어린이일 때는 작은 실수로 넘어갈 수 있는 일도, 자라서는 사고가 된다. 아이들은 작게 자주 다쳐봐야 잘못을 배우고 또 고칠 수 있다. 엄마 되기 이전에 들었던 그 말을 요즘들어 자주 곱씹게 된다.
삶은 매끄럽지 않다. 울퉁불퉁하다. 너무 거칠어서 쓰라린 날들도 있다. 그래도 꿋꿋이 살아가려면 위험을 무릅써보고, 상처에 밴드를 붙여보는 경험이 필요하다. 그러다 보면 상처인 줄 알았던 일이 사실은 늑대 친구가 생기는 것처럼 멋진 이벤트가 되는 날도 있겠지. 최근 엄마로서 나의 가장 큰 화두는 아이 삶에서 한 발짝 물러서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