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엘랑비탈 Mar 01. 2023

5. 독서의 시작

선과 나무의 홈스쿨링

일찍부터 글을 읽게 된 나무는 책을 좋아했다.

특히, 선이 나무를 안고 그림책을 읽어줄 때 나무의 표정은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얼굴이었다.

선은 감동했다.

내가 누구에게 이렇게 기쁨을 줄 수 있는 존재라니!     




나무는 세 돌이 지났을 무렵, 어린이 집에 다니고 있었다.

그때, 선은 남편을 도와 가구점을 시작했다. 그래서 예전처럼 나무에게 책을 읽어줄 수 없었다. 안타까웠다.

비가 오는 날 저녁, 사람들의 발길이 끊겼을 때, 선이 나무에게 말했다.     


“오늘은 엄마가 책 읽어줄게요! 책꽂이에서 읽고 싶은 책, 골라 오세요!”     


클레이 애니메이션 핑구를 보면서 혼자 깔깔거리고 웃고 있던 아이의 얼굴이 갑자기 불이 켜진 듯, 한층 더 밝아졌다.

아이는 신이 난 얼굴로 그림책이 있는 곳으로 뛰어가더니 책꽂이에서 그림책을 마구 뽑기 시작했다.

선이 그 모습을 보며 소리쳤다.     


“오늘은 아홉 권만 가지고 오세요!”     


신이 난 나무는 엄마의 말을 못 들은 척, 조그만 몸으로 그림책이 꽂혀있는 책장을 왔다 갔다 하면서 스무 권쯤 되는 책을 소파 테이블 위에 옮겨 놨다.

한 권이라도 더 옮겨놓으려고 부지런히 움직이는 모습이었다.

그걸 지켜본 선이 다시 소리쳤다.     


 “이제, 그만!”     


엄마와 함께 하는 즐거운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늘리고 싶은 나무의 간절한 마음이 느껴졌지만 선이 제지하지 않으면 책장에 있는 책을 모두 옮겨놓을 기세였다.


선은 아이에게 미안했다.

아이는 엄마와 함께 책을 보면서 (나무의 표현대로) 오순도순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는데(나무는 종종 선에게 웃으면서 우리 오순도순 이야기하자고 말했다) 장사 때문에 아이가 원하는 만큼의 시간을 가질 수 없었다.

선은 그 흩어진 시간을 생각하면 마음이 허탈해졌다.

과연 아이의 마음을 외면하고 번 돈이 얼마였을까?

조금 더 잘 먹고(외식), 잘 입은 거뿐, 뿌듯함이 없는 시간이었다.

선은 그 시간을 아이와 함께 보냈더라면 하는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그렇게 좋아하는 책을 나무는 일곱 살이 되도록 혼자 보려고 하지 않았다. 선이 꼭 무르팍에 나무를 앉혀놓고 책을 읽어줘야 했다.

‘이상하다! 왜? 나무는 혼자 책을 안 읽으려고 하지?’ 선은 내심 실망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나무에게 계속 책을 읽어 주었다.

그런데 어느 날, 선이 감기로 자리에 누운 날이었다.

나무가 집에 있는데도 몇 시간째, 집안은 조용했다.

벌레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걱정이 된 선은 자리에서 일어나 나무의 방으로 갔다.

나무는 책이 가득 들어 있는 택배박스 옆에서 낄낄거리면서 혼자 책을 읽고 있었다.     


“나무야 뭐 해?”


나무는 행복한 듯, 웃으면서 책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삼국지 읽어!”

(삼국지를 저렇게 낄낄거리면서 읽다니!)


“재밌어?”


“응!”     


나무는 더 이상 방해하지 말라는 신호로 빠르고 짧게 대답하면서, 책 속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계속 웃고 있었다.

만화나 그림책이 아닌 글자가 빽빽하게 인쇄된 어린이용 삼국지였다.

이모가 사촌 형이 읽은 책들을 모아 택배로 보냈는데, 선이 아파서 테이프만 뜯어 놓은 것을, 나무가 그 택배 박스 안에서 세 권짜리 삼국지를 꺼내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 후로 나무의 독서량은 엄청나게 늘어났다.

역사, 과학, 동화 등 닥치는 대로 읽기 시작했다.

생활비의 삼분의 일이 도서 구입비로 빠져나갔다.

그동안 나무가 혼자 책을 읽으려고 하지 않았던 이유는 엄마와 함께 있는 시간이, 엄마와 함께 느낌을 공유하면서 책을 읽는 시간이 너무 행복했던 것이다.

           



나무는 어린 나이임에도 앉은자리에서, 두세 시간 이상 책을 읽었다.

그렇게 책을 읽고 난 후의 나무의 눈빛을 보면 새로운 것을 발견한 기쁨으로 출렁이는 것 같은 흥분을 느낄 수 있었다.


A가 B를 만난 발생의 시간―책 속에서 새로운 세계를 접한 아이는 엄마에게 그 세계에 대해, 가까스로 흥분을 제어하며 입을 열기 시작했고 선은 나무가 인지한 것에 대해 (소중한 것을 대하듯) 온 신경을 집중하면서 피드백을 해 주었다. 마치 그 시간은 나무의 생각의 퍼즐과 선의 사유의 퍼즐이 정교하게 맞춰지는 시간이었다―그 시간은 고요했고, 충만했고, 거룩했다.


엄마의 피드백에 의해 나무의 시냅스가 쭉쭉 연결되는 것 같았다.

그런데 나무가 학교에 들어간 이후로는 그런 깊이 있는 시간이 불가능해졌다(화교 학교에 다닐 때, 나무도 다른 아이들처럼 영어 학원이나 피아노 학원에 다녔다. 예체능도 다른 아이들과 수준을 맞춰야 수업에 적응할 수 있었다).

우선 시간에 쫓겼다. 나무는 학원에 갈 시간이 되면 한창 흥이 올라 재미있게 읽던 책을 덮어야 했다. 맥이 끊겼다.

선은 안타까웠다.

학교에 다니기 위해 고급사고로 이어지는 시간을 포기해야 하다니!

이전 05화 4. 아이가 말을 배우는데 왜 글을 못 배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