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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승수 May 25. 2019

우주피스(Užupis) 공화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세계여행 Day 73]

#0. 


“모든 사람은 빌넬레(Vilnele) 강변에 살 권리가 있고, 강은 모든 사람 곁을 흐를 권리가 있다.” 
– 우주피스 공화국 헌법 제 1조  




#1. 


 어렸을 때 누구나 한 번씩은 상상 속에서 나만의 나라를 세운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만 이루어진 환상의 나라. 내가 하고싶은 대로 해도 전혀 문제될 게 없는 아름다운 나라.


 유치원 시절, 의자 두 개 위에 널어놓은 이불 빨래 밑으로 기어들어가면 생기는 그 작은 공간이 그랬었다. 작은 스탠드 하나만 켜도 환해지는 비밀스러운 공간에 레고와 로보트 장난감을 들고 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놀았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학교가 끝나면 친구들과 함께 달려갔던 뒷산 공터가 그랬었다. 크고 작은 나뭇가지를 주워 모아서 가슴 높이까지 오는 작은 아지트를 만들어놓고 당시 유행하던 애니메이션을 따라 <케로로왕국>이라 이름을 붙였었다. 해가 질 때까지 하는 거라곤 캐릭터 역할 놀이가 전부였다.


 어느 순간부터 그런 허황되고 낭만적인 상상은 하지 않기 시작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내 생각과 상상의 울타리도 사회 안에 맞게 조정되어야 했다. 
 누군가는 그게 철드는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간혹 너무 낭만을 잃어버리지 않길 주문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경우엔 성장의 자연스러운 과정이라고 여겼다.




#2. 


“모든 사람은 특별해질 권리가 있다.”
– 우주피스 공화국 헌법 제 5조


“모든 사람은 사랑할 권리가 있다.”
– 우주피스 공화국 헌법 제 6조


“모든 사람은 행복할 권리가 있다.”
– 우주피스 공화국 헌법 제 16조




#3. 


 하루는 친구와 술자리에서 그런 얘기를 주고받은 적이 있다. 우울이라는 상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내용으로.
 굳이 말하자면 나는 적당히 우울한 기분을 즐기는 편이다. 외롭고 슬픈 감정이 주는 분위기가 아이러니하게도 꽤 좋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친구 왈,

“사람이 보이는 거랑 다르게 왜 이렇게 어두워? 사람이 밝고 행복해야 사는 맛이 나지.”


 우울증을 치료하는 건 다 이유가 있다고 했다. 그런 상황이 너무 많으면 위험해질 수 있다고 했다. 그러니 항상 밝은 생각만 하고, 재밌는 거 많이 보고 행복해지라고 했다. 
 “우울하면 왜 안돼?”라고 질문을 하고 싶었지만, “그렇구나.”라고 말해버렸다.


 ‘가끔은 우울하고 슬플 수 있으면 좋겠다. 내가 좋아하는 상태가 비정상적이라고 생각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 계속 되뇌면서 마음에 담아 놨던 말이다.


세계 각국으로 번역되어있는 우주피스 공화국의 헌법. 아쉽게도 한국어 번역본은 없다.


#4. 


“모든 사람은 사랑받지 않을 권리가 있지만,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 우주피스 공화국 헌법 제 7조


“모든 사람은 게으를 권리가 있다.” 
– 우주피스 공화국 헌법 제 9조


“모든 사람은 행복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
– 우주피스 공화국 헌법 제17조


“모든 사람은 자신의 생일을 축하하거나 축하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
– 우주피스 공화국 헌법 제 26조


“모든 사람은 울 권리가 있다.”
– 우주피스 공화국 헌법 제 33조


“모든 사람은 아무 권리도 갖지 않을 권리가 있다.”
– 우주피스 공화국 헌법 제37조




#5. 


 세상엔 나와 다른 모습을 하고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아니 모든 타인은 그런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으면 참 좋겠지만, 그럴 수 없다면 그대로 내버려두고 ‘그럴 수도 있지!’하는 게 존중임을 이제는 어느정도 알고 있다. 하지만 종종 우리는 지겨울 정도로 날 재단하는 시선과 마주한다.


 이 지역에 살던 사람들도 분명 그런 편견 가득한 시선으로부터 절대 자유롭지 못했을 거다.


 2차 세계대전 홀로코스트를 겪고 난 후 공동묘지로, 폐허 마을로, 결국엔 노숙자와 마약중독자, 매춘부가 숨어사는 빈민가로 남아 이름만 간간히 유지해오던 우주피스 지역이 1997년 4월 1일 갑자기 독립선언을 했다.


 그 후 매년 4월 1일이 되면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 안에는 하루 동안 새로운 나라가 하나 더 생긴다. 소설 속에서나 나올 것 같은 이름을 하고서 말이다. 
 평소에는 작은 다리를 건너 누구나 자유롭게 들어갈 수 있는 지역이지만 4월 1일만 되면 그 다리에 입국심사대가 생긴다. 이 입국심사대를 통과하기 위해선 다른 여느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여권과 비자가 필요하다. 당연한 소리지만 우주피스 공화국엔 대통령과 내각이 있고, 국기도 있고, 나름의 화폐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헌법이 있다.


 총 41개 조항으로 이뤄진 우주피스 공화국 헌법은 그 어느 나라의 헌법보다 아름답다. 빛이 들지 않는 가장 낮은 곳에 있던 사람들이 자유와 낭만을 외치며 한 글자씩 적어낸 삶의 방향이란 이런 거구나 싶다.


 조금 더 성숙해진 사람들이 만들어 낸, 너무나 낭만적이고 인간적인 나라 ‘우주피스 공화국’. 나를 나 자체로 존중해주는 헌법을 가진 이 나라를, 나는 도무지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




#6. 


“개는 개가 될 권리가 있다.”
– 우주피스 공화국 헌법 제 12조


“고양이는 주인을 반드시 사랑해야 할 의무가 없다. 하지만 주인이 도움을 필요로 할 땐 반드시 도움을 주어야 한다.” 
– 우주피스 공화국 헌법 제 13조



우주피스 공화국의 영토임을 나타내는 표지판, 그리고 천국으로 향하는 길을 알려주는 화살표다. 여기서 12km만 걸어가면 천국이란다. 생각보다 멀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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