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끄적이는 글]
아직 찬바람이 채 가시지 않은 봄날에 학교로 돌아왔다. 쨍한 파랑 느낌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세계 이곳저곳을 여행하면서 알게 된 나는 참 느린 사람이었다. 생각의 속도도, 움직임도, 그 무엇 하나 빠른 게 없었다. 100m 달리기를 해도 결승점까지 전속력으로 달려가지 않고 중간에 한 번쯤 쉬어주는 그런 타입이었다. 그렇게 달팽이처럼 여유와 느긋함을 가지고 살아갔던 게 불과 몇 달 전이다.
하지만 캠퍼스에서 갑자기 불어오는 바람은 속도감이 참 대단하다. 원래 이 정도로 강풍이었나 싶을 정도로. 그걸 온몸으로 맞으면서 정신을 못차리고 있다.
하루에 하늘을 몇 번 보는지가 행복함의 기준이라고 생각했다.
여행을 다닐 때는 하염없이 하늘을 바라봤던 적이 많다. 그래서 구태여 횟수를 세려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한 손으로 셀 수 있다. 기억해보면 한 번도 하늘을 올려다보지 않은 날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다보니 가끔은 지난 겨울의 기억이 희미해진다. 내가 경험한 과거가 아니라 단지 잘 짜여진 영화를 한 편 본 것 뿐이라는 착각이 든다. 지금의 현실과 너무 큰 괴리감이 느껴지는 탓이다.
그래서 종종 잊는다. 오롯이 앉아서 풍경과 사람을, 가끔은 허공을 쳐다보면서 생각하고 글을 끄적이던 때가 나에게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
여행을 다니면서 그림을 그리고 순간순간을 문장으로 남겨놓은 사람을 만났다. 드로잉북 한 페이지 한 페이지마다 담겨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아직도 설레하고 벅차하는 그 사람의 감정히 고스란히 다 느껴졌다. 그걸 바라보고 있으니, 순간의 기억을 보관하는 일이 얼마나 값진지 다시금 생각났다.
그림을 그리는 일과 글을 쓰는 일 모두 저기 어딘가 있는 하나를 지긋이 바라보는 일이다.
그리고 그걸 바라보는 내가 느끼는 감정과 기분을 차분히 기록하는 일이다.
나처럼 느리게 사는 사람에겐 그런 일이 중요하다. 강풍을 조금이나마 막아주는 바람막이와도 같으니까 말이다.
-
조만간 또 떠나야겠다.
어디로든지 지금보다는 조금 더 느려질 수 있는 곳으로. 걷는 속도를 다른 누군가에 맞추려고 눈치보지 않아도 되는 곳으로.
2018. 05. 21